숲에게 길을 묻다_김용규_안광호_의식경영연구회

독서리뷰 2014.09.22 02:00

 

 

[숲에게 길을 묻다, 김용규]

 

 

'요즘 부쩍 숲에 관심이 간다.'

누군가 어떤 때에 뭔가에 꽂힐 때가 있다. 요즘 내게 그 대상은 '' 이다. 출 퇴근 가능한 거리에 온전히 숲이 보존된 곳에 평생의 '' 와 나에게 맞춤 같은 집을 짓고자 늘 알아보고 있는 요즘이다. 그런가 하면 언제 시작할 지는 아직 모르지만, '나무 클라이밍' 에 대한 관심도 새롭게 생겼다. 새롭게 생겼다기 보다는 늘 숲에 관심이 있다가 이런 것도 있구나 하고 접촉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겠다. 늘 그래왔듯이 매일 새벽 나는 뒷산 숲 속을 산책하고 뜀박질을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이뿐인가? 한 달에 한두번은 아이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야영을 한다. 나는 언제나 그래왔다. 숲이 그냥 좋았다.

 

숲 속에서 살면서 자기 밥벌이 까지 할 수 있을까? 가끔씩은 이런 생각들을 한다. 아마도 은퇴 후에는 밥벌이는 모르겠으나 좀 더 숲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은 분명하다. 이런 나에게 어떤 책이 한 권 손에 잡혔다. 그냥 저자가 숲을 택한 방식이 좋아서 그의 책을 읽어 보았다. 이 책의 저자 '김용규' 는 별난 사람이다. 별나다기 보다는 제대로 된 사람이라 칭하고 싶다. 자기 색깔대로 살겠다고 선언한 그런 용기있는 인물이다. 이런 사람들이 별나다고, 또 용기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 요즘은 작태다. 그 만큼 사람들에게 일은 밥벌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언제 우리의 공교육과 사교육이 뭐가 나에게 가장 가슴 뛰는 일인지에 대해서 물어 주기나 했던가? 맹목적으로 성적만 올려 놓으면 저절로 다른 것은 따라오겠지 하고 여겼지만 세상 일이 어디 그렇던가? 단지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살고 있으니 서로 위안 삼고 살아갈 뿐.

 

김용규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자. 그는 대기업에서 분사한 벤처회사의 CEO 였다. 전후 사정은 모르지만 30대의 나이에 CEO 를 맡길 정도라면 상당한 능력이 있는 엘리트였을 것이다. 그런 그가 마흔의 길목에서 도시의 삶과 CEO라는 달콤한 타이틀을 버리고 숲으로 갔다. 그리고 '백오산방' 이라는 숲 속 오두막에 살며,  '행복한 삶을 배우는 숲 학교' '행복숲 공동체' 를 만들고 있다. 숲에 살다보니 어느 새 숲의 가르침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런 자기만의 통찰을 이 책을 통해 대중들에게 전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태어남, 성장함, 나로 살기, 돌아가기' 4 장으로 이뤄져 있다. 인생전반의 굵직한 주제들을 숲 속의 나무, , 바람으로 부터 얻은 통찰로 풀어가고 있다. 이 책의 서두에 적어 놓은 이 한 문장은 꽤 자극적이며, 우리를 가슴뛰게 하는 뭔가가 있다.

 

'길 위에 서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길을 잃은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그의 글은 차분하다. 차분하지만 설득력이 있고 가끔씩 사람을 뒤흔드는 구석이 있다. 그의 글에서는 또한 '고 구본형' 선생의 냄새가 난다. 아니나 다를까? 김용규 또한 어떤 식으로든 구본형 선생과 깊은 인연을 맺은 듯 하다. 구본형 선생의 글은 사람의 마음을 마구 뒤흔드는 강렬한 힘이 있다. 그 힘이 너무 강하다 보니 한가지 아쉬운 것은 그의 문하생들의 글에서 그의 글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는 점이다. 김용규의 책에서는 그나마 그런 부분들이 잘 절제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사회적인 '' 만 존재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노라 했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학교와 숲이 좋았다고 한다. 단순하지만 강렬한 욕망을 담아 그는 숲에서 '무면허 선생' 노릇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숲의 속삭임에 따라 자연을 보았으되 그 자연과 하나되어 보았노라 고백했다. 되어본다는 것, 온전히 그것과 하나가 되기 위한 전초 과정이나, 나를 내려놓음이 없이는 결코 그리 되지 않을 것이니, 저자의 그릇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삶은 나 라는 생명에게 깃든 위대한 자기완결의 힘을 믿는 한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다.'

 

자기완결의 출발은 끌림을 알아차리는 데 있다. 그리고 그 끌림에 온전히 자기를 맡길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알아차림은 쉬운 듯 하지만, 쉽지 않다. 시장 바닥의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은은하게 하지만 내 가슴을 이끄는 한 소절의 음악을 찾는 격이다. 먼저 세상이 정해 준, 내가 생각으로 만든 나를 내려놓아야 끌림을 알아차릴 수 있다. 잘 듣고, 잘 보기로 다짐하고 실천하는 것이 자기완결, 그리고 영성의 출발이다.

 

[1막 태어나다]

'모든 생명은 자기답게 살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

우리도 그렇다. 그렇게 살지 말라고 막는 이는 아무도 없다. 심지어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 를 주었다. 신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막을 수 없다. 그 만큼 우리는 선택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힘은 잘 헤아려야지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선택의 힘을 가지고 얼마나 가슴뛰는 삶을 살고 있는가? 자기답게 살 때, 아름다움이 넘친다. 아름다움은 '알음' '다움' 의 준말이다. 스스로 잘 헤아려 자기다움을 찾고, 알아차린 대로 내 모든 것을 다 바칠 때, 진정 존재는 아름답게 느껴진다. 씨앗은 나무의 꿈을 가지고 태어나, 나무로 자란다. 하물며 사람이랴! 하지만 눈이 멀어 우리는 나 대로의 삶을 사는 것 마저 어려워한다. 비근한 예로 내가 속한 직장에는 세계 최고의 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근무하는 연구원들이 많다. 그들이 꿈을 잃고 방황하는 모습, 더구나 그 와중에서도 스스로 연구원 생활의 이상적인 그림 하나 못 그리는 현실은 개탄스럽기까지 하다. 철학이 빠진 학문은 유치하며, 맹목적이며, 위험하다.

 

자기의 길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단 걸어야 한다. 바로 자기의 길을 찾기는 힘들다. 하지만 일단 걷기 시작하면 여기에 막히고, 저기에 걸려 보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다. 머리로 고민해 봐야 나아지는 것은 없다. 인간은 언제나 길을 잃음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길을 찾는다. 저자가 인용한 데이빗소로우의 말 처럼, "길을 잃어보기 전에는 자신을 찾아내지도 지금 서 있는 위치와 자신이 맺고 있는 무한한 관계를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숲에는 태어난 자리를 억울해하는 생명이 없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실천하는 용기와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는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의 기도문이 생각난다. 평생 환경 탓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미 그렇게 주어진 것이다. 불평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은 진실이고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삶의 회피,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삶을 언제까지 살 것인가? 거부하면 할 수록 세상과 점점 더 고립될 뿐이다. 누구도 염세주의자와 관계 맺기를 원하지 않는다.

 

숲의 생명체는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일단 받아들임을 전제로 자신의 삶을 시작한다. 바위에 소나무 씨앗이 발아되었다고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 이리 저리 몸을 틀어 생명을 키우다 보니 멋진 낙락장송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남과의 싸움이라기 보다는 온전한 자기 자리에서의 자기극복이다. 우리 삶도 사실 그렇다. 남과의 경쟁이라고 하지만 그 남을 통한 자기의 성장과정이지 않을까? 남을 통해서 내 부족함을 알아차리고 또 한 발짝 성장의 발을 내딛는 것 말이다. 그의 책의 표현처럼 누구도 자신의 하늘을 열지 못하면 머지 않아 죽음을 맞을 뿐이다.

 

받아들임은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론이 아니다. 사실 운명이란 나쁜 말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런 뜻으로 사용해서 그렇지, 운명에는 변화와 역동이 포함되어 있다. 즉 나 스스로 능동적으로 내 삶을 개척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론을 새롭게 '고명론(固命論 고착된 명이론)' 이라 부르자. 태어난 자리를 바꿀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진정한 긍정이다. 그 받아들임 이후에 자신의 삶의 방향과 갈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것이 어찌 운명론인가? 오히려 자신의 태어난 자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평하면서 움직일 수 있는데도 가만히 땅에 엎드려 있는 것이 비겁한 운명론(고명론)이 아닐까?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할 때, 이런 사람들은 삶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린다. 자신의 길을 못 찾으니 남들 가자는 데로 이리 저리 휩쓸린다. 스스로 주인됨을 잃어버리고 노예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바꿀 수 없는 숙명을 받아들이고 운명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2막 성장하다]

'나무에게는 빛, 사람에게는 꿈'

저자의 고백부터 들어보자. 그 고백은 가슴을 들뜨게 하는 매력이 있다. 이런 유혹하는 글쓰기의 원조는 그의 선생, 구본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빛을 잃은 나무가 시들듯이, 꿈이 없었던 저자의 삶에 대한 묘사다.

 

"하루의 삶은 늘 바빴고 이러저러한 사회적 관계는 현란했으며 외양은 고왔으나, 내 영혼은 참 초라하구나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가? 외양도 초라하고, 내 영혼도 초라하거나, 둘 다 풍성하거나 어느 하나가 초라하거나 일 것이다. 모두 풍성하지 않다면 일단정지! 잘 듣고 잘 살피고, 또 잘 헤아려 자신의 길, 자신의 꿈을 찾아야 한다. 우리 교육은 꿈을 묻지 않는다. 성적만 올려놓고 보자는 식이다. 꿈을 물어주지 않아 꿈이 없는 아이들에게 성적만을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압박이다. 동기부여가 전혀 되지 않는 것이다. 말 잘 듣고 막상 좋은 대학교, 좋은 직장 다녀보니 이게 아닌데 하는 자괴감과 이 사회에 사기를 당했다는 느낌마저 든다.

 

'담담하게 지니고 있는 상처야말로 그다운 향기다'

나이가 들수록 멋있는 사람이 있다. 얼굴이 잘생긴 것도 돈이 많은 것도 아닌데, 바라보면 볼수록 멋있는 이가 있다. 뭐랄까? 겉 멋이 아닌 속에서 우러나오는 멋이 느껴지는 그런 사람 말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그 만의 독특하고 은은한 향내가 난다. 이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다 상처와 시련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봄에 산수유가 핀다. 그런데 아파트 단지에 심어진 산수유 꽃에는 향기가 별로 나지 않는다. 하지만 산속에서 자란 야생의 산수유 꽃에서는 아주 진한 향기가 난다. 홀로 긴 겨울의 눈보라의 시련을 거치면서 단련된 탓이리라.

 

저자는 자신을 음나무를 닮았다고 했다. 젊은 시절 자기는 그렇게 가시를 달고 살았노라 했다. 왜 가시를 달고 사는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는 그 만큼 자신이 약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흔히 분노와 같은 부정적 감정이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 볼 때는 강한 것 같아도 속은 약하기 짝이 없는 것도 같은 이치다. 하지만 음나무를 관찰해 보니, 어느 정도 자라면 가시를 떨어뜨린다고 했다. 어린 나무일 때는 순이 약해서 새나 짐승들의 먹이가 될 까봐 가시라는 방어막을 쳤지만 자기가 어느 정도 자랐다고 생각하니 가시가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것이다. 저자도 그렇게 성장을 했다. 분노라는 가시를 계속 가지고 있기 보다는 자기를 성장시키는 에너지로 재활용 한 것이다. 데이비드호킨스 박사의 '의식혁명' 을 보면 분노를 잘 승화시킬 때 창조에너지로 거듭남을 알 수 있다. 한편 저자는 분노라는 가시를 가득 단 사람을 만나더라도 너무 미워하지 말고, 그 안에 자신을 지키려는 에너지가 고독하게 흐르고 있음을 알아주라고 한다. 그 마음 씀이 참 착하다.

 

'다퉈라! 그러나 제대로 다퉈라!'

신은 생명을 지속하는 강력한 원리의 하나로 경쟁이라는 장치를 두었다. 하지만 인간의 경쟁은 변질되었다. 일단 자연의 경쟁은 정정당당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의 길을 위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련의 과정일 뿐이다. 그것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갖기 위한 투쟁이다. 이는 자신과의 아름다운 다툼일 뿐이다. 저자의 말처럼 수 많은 이웃의 욕망이 충돌하는 수직의 공간에서 자기의 하늘을 확보할 힘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목숨을 걸고 생명을 유지하려 한다. 우리는 어떤가? 궁극적으로 자신과의 투쟁임을 망각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그래서 때로는 부정도 서슴지 않는 치졸한 싸움판일 뿐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목숨을 걸 만큼 최선으로 덤비느냐 그것도 아니다. 누군가의 이익을 빼앗고 누르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 아님을 우리의 가슴은 알고 있다.

 

'성장을 위한 아름다운 생명의 그물망'

삶은 관계다. 우리의 삶은 수 많은 관계와 그 관계 속에서의 선택과 만남으로 이뤄져 있다. 일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영성과의 관계 등. 삶의 기술은 그래서 관계의 기술이다. 관계를 하다보면 삐걱 거리는 지점이 있다. 내가 두루 원만하지 않음을 알려주는 그래서 삶의 기술을 더 발전시켜야 할 지점인 것이다. 저자의 이 책에서 숲 속 생명체들의 관계성과 공생이 놀랍게 다가왔다. 예를 들어 열매를 새에게 제공함으로써 새의 배설물을 거름으로 씨앗을 발아하게 하는 나무의 삶이 그랬다. 이런 씨앗들에는 씨앗을 보호하는 막이 있어, 새가 소화를 할 때에 그 시간에 맞춰서 막이 녹게 된다고 했다. 이들의 공생은 자신을 온전히 내어 줌으로써 이뤄진다는 점에서 훨씬 더 극적이고 감동적이다. 정말 우리 인간도 온전히 누군가의 밥이 됨으로써 새롭게 성장할 수 있는 그런 관계성을 맺을 수 있을까?

 

[3막 나로서 살다]

'각자에 맞는 유혹기술을 키워라'

꽃이 수정을 맺는 방법은 크게 3가지다. 바람을 매개로, 곤충을 매개로, 또는 새를 매개로 하는 것이 그것이다. 개암나무를 위시한 풍매화는 바람을 매개로 해야 하기에 꽃 하나에 보통 500만 개의 꽃가루를 담을 수 있다. 바람을 기다리고 바람에게 말을 걸어 자신의 꽃가루를 날려보내 수정을 이룬다는 것은 얼마나 극적인가? 그 확률낮음 에서 종족을 번식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수의 꽃가루를 생산하는 것이다. 풍매화의 꽃은 수수한데, 굳이 벌이나 새들을 유혹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가장 적합한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개 중에는 무려 5,000 킬로미터를 날아서 수정을 한다고 하니 기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에 반해 우리가 자주 보는 충매화는 벌이나 나비 같은 곤충을 매개로 한다. 하여 꽃 색깔이 화려하고 향기가 진하다. 벌이나 나비를 유혹해야 수정에 성공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각각의 꽃이 작고 볼품이 없다면 집단으로 꽃을 피워 자신을 알린다. 조팝나무나 싸리나무 등은 대표적이다. 심지어 산딸나무라는 녀석은 그것도 모자라 잎의 색깔마저 꽃 모양처럼 보이게 위장을 해서라도 곤충들을 유혹한다. 벌은 꿀을 얻기위해 꽃을 찾는다. 꽃은 꿀을 내어주고 꽃가루를 벌이나 나비의 다리에 자주 무쳐야 한다. 하여 꽃들은 꿀의 위치를 알기 쉽게 알려주기도 한다. 이런 유색의 선을 '허니가이드' 라고 부른다. 이들의 유혹은 강렬하고 또 배려심이 깊다. 병꽃나무나 인동덩굴의 경우 수정이 이뤄진 뒤에는 색을 바꿔 곤충의 수고를 덜어주고, 또 복수초는 안쪽의 온도를 높여 아직 추운 이른 봄, 곤충들을 따뜻하게 해 준다고 한다. 심지어 유카꽃이나 무화과꽃은 유카나방이나 무화과 말벌에게 알을 낳을 공간까지 제공한다고 한다. 댕강나무는 또한 수정이 이뤄지면 향기를 거둬들이는데 이 또한 곤충에 대한 사려깊은 배려라 할 수 있다.

 

책에서는 찰스다윈의 이 말이 나온다.

"자연은 영구적인 자가수분을 혐오한다"

자가수분은 공멸의 지름길이다. 조선의 학자들이 고려가 왜 멸망했는지를 조사해 보니 근친결혼이 큰 원인이었다. 하여 동성동본간의 결혼을 엄격히 금지 시켰다. 우리들도 자신들의 영역만 고집하고 이 안에서만 소통이 이뤄진다면 식물의 자가수분처럼 조만간은 함께 공멸할 것이 예측된다.

 

자기의 색깔과 향기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남 눈치보며, 사회가 짐 지워진 것에만 매달리다 보면 서서히 자기의 색깔과 개성을 잃어버린다. 우리 교육이 지금 이렇다. 맹목적으로 공장에서 아이들을 찍어 내듯이 적당하게 모든 것들을 잘 하는 수재로 만들려 한다. 목적과 방향도 없이 성적을 올리면, 성공을 한다는 식이다. 과연 그 성공은 누구를 위한 성공인가? 사람이 자기다움을 잃어버릴 때, 향기를 잃어 버리고 그 사람의 매력은 떨어진다. 내 주변에는 아주 학벌 좋은 친구들이 많다.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친구들이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미국의 명문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이곳으로 왔다. 하지만 그 중에는 정말 자기 인생의 가슴뛰는 그림 한 장 없이 수동적으로 사는 친구들도 있다. 그들은 삶에 대해서 스스로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수준도 가십거리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관계성과 갈등이슈에 대한 처리를 힘들어하고 틀에 짜여진 일 이외에는 잘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수 십년을 투자해 전공지식을 쌓았을지는 모르나 삶의 철학이 없기에 공허한 메아리 처럼 들린다.

 

우리는 얼마나 매력적이고 유혹적인가? 유혹과 매력은 자기의 길을 가는 것에서 나온다. 그런가 하면 앞서 이야기 한 나무들은 얼마나 배려심이 깊은가? 우리 스스로가 충분히 매력적이며, 관계성에 있어 또한 넉넉하게 배려심도 크다면 어느 누가 우리를 좋아하지 않겠는가? 반성하고 또 배워나간다.

 

'사랑의 방식, 연리목과 혼인목'

책의 내용을 보자. 사람의 만남이 인연이라면 나무의 인연은 차라리 숙명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공간을 공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안에서 연리지가 이뤄낸 사랑은 숭고하다. 자신의 살을 내어주지 않고는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살을 에는 아픔을 딛고 일어서야만 이뤄지기 때문이다. 바람이 수시로 방해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런 숭고한 사랑을 이룬다. 연리목의 사랑이 있는가 하면, 혼인목의 사랑도 있다. 그것은 나도 있으면서 그도 있는 사랑이다. 연리목이 제 살을 내어주며 하나로 합일하는 사랑이라면, 혼인목은 서로의 가지를 떨어뜨려 서로의 공간을 열어주는 사랑이다.

 

우리는 얼마나 이런 사랑을 자주 하는가? 감각적이고 열정의 사랑이 끝나면 서로 함께 내어주어 하나를 이루는 그런 숭고한 사랑은 온데간데 없다. 서로의 살을 내어주기는 커녕, 자기만의 틀에 갇혀 대화는 단절된다. 부부라고 하나 그냥 형식적인 관계로 치닫는 사람들은 또한 얼마나 많은가? 스스로 많이 반성해 볼 일이다.

 

'홀로서기'

책에는 큰오색딱따구리의 자식사랑에 대해서 나온다. 새끼들이 둥지를 떠나야 할 때 엄마 새는 더 이상 새끼들에게 체온을 남겨주지 않으며, 아빠새도 이별을 준비하는 순간부터 새끼들의 둥지에 머물지 않는다. 새끼들을 내 보내는 것이 그들을 위한 더 큰 사랑임을 알기 때문이다. 둥지를 떠나는 순간 푸른 하늘은 그들의 것이 되고, 그런가 하면 폭풍우가 치고 눈이 쏟아지는 하늘도 그들의 것이 되리라. 하지만 그렇게 새끼들을 보내고 아빠새는 몇 시간 동안 나무 전체를 더듬으며 새끼가 아직 나무 근처에 있지는 않는지 찾는다. 새끼의 둥지를 떠나 숲으로 사라지는 아빠새의 입에는 마지막으로 전해주고자 했던 먹이가 그대로 물려 있었다고 한다. 나무들도 마찬가지다. 단풍나무는 씨앗에 프로펠러를 달아 자식을 더 멀리 보내며, 소나무도 씨앗이 발 아래에 떨어질 위험을 피하려 한다. 도꼬마리나 도깨비바늘은 동물들의 털에 씨앗을 붙임으로써 자식들을 멀리 보낸다.

 

오직 인간만이 자식을 끼고 내 보내려 하지 않는다. 그게 사랑인 줄 알지만 결국 자식을 성장시키지 못하고 망치는 지름길임을 알고 있을까? 이것은 뭐랄까? 사랑을 가장한 부모들의 욕심일 뿐이다. 그 안에는 자식을 영원히 자신의 손아귀에 두려 하거나, 아니면 자식을 통해 자신의 제 2의 인생을 투영하려는 욕심이 있을 수도 있다. 사랑을 가장한 이들의 통제는 무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어 본인도 알아차리기 힘들다. 따라서 아주 교묘하기까지 하다. 자식이 스스로 성장할 수 없게 자식이 해야 할 일을 다 챙겨줌으로써 자신에게 평생 의존하게 만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자기를 떠나려 하면 양심의 가책과 죄의식을 느낄만한 행동을 한다. 부모가 다 큰 자식들을 내보내지 않고 이것 저것 해 주기 시작하면, 자식들은 또 나름대로 무의식 속에 '내가 뭔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 부모님이 나를 이렇게 돌보는구나' 하며 위축감과 결핍감을 느낀다. 지금 물어보라. 정말 자식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자식에 대한 나의 보살핌은 내 욕심 때문은 아닌지? 그로 인해 자식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지?

 

'죽음'

이 책의 내용을 먼저 살펴보자.

'죽음을 두려워 마라. 두려워할 것은 오히려 살고 있으되 살아 있음에 철저하지 못하고 죽음의 때에 이르러서도 그 죽음에 철저하지 못한 우리의 삶이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일은 신이 그대에게 부여한 삶과 죽음의 기회를 헛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왜 그런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짜 내가 누군지를 안 사람은 죽음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처음 부터 태어나지도 않은 그래서 죽을 수 없는 그 '' 를 발견하면 그렇게 된다. ! 너무 거창한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좀 세속적으로 들어가보자. 나는 늘 언제고 기쁘게 죽을 준비를 하라고 말하고 싶다. 언제 우리의 몸이 죽음을 맞이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을 안다면 또 인생이 재미없지 않겠는가? 모르니 재미있고, 또 모르니 그나마 열심히 사는 것 아닐까? 여하튼 언제고 죽음이 다가올 때, 기쁜 얼굴로 참 잘 살았구나 하며 그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삶을 아주 잘 살아야 한다. 그래서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삶을 허투루 살지 않는다. 순간 속에 최선으로 자기를 이뤄내는 그런 성장의 사람으로 산다면 죽음은 하나의 아름다운 축제가 될 것이다. 이상으로 이 책의 리뷰를 마친다.

안광호 (khajoh@naver.com)

[주제어]:숲에게 길을 묻다, 김용규,

 [리뷰어 소개]

안광호 박사는 포항공대 전자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삼성전자에서 5년 동안 통신용 반도체를 개발했습니다. 그중 5제품을 양산하여 국가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세계최초로 CDMA1 Chip Transceiver 를 개발한 경험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2006년부터, 지식경제부산하 국가연구소인 '전자부품연구원'에서 팀장으로 근무하며, 국가의 미래 먹거리 창출을 기획하고, 선도형 기술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잘산다는 것이 뭘까? 에 대한 순수한 탐구욕을 가지고 있으며과학의 바탕위에 인간의 심리와 의식세계를  통합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글로 풀어가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알아차림, 매일경제신문사], [소프트마인드, 비전과리더십], [마음세수, 예문당], [삼성붕괴시나리오, 다산북스], [열다섯 살 꿈의 시크릿, 미래지식], [긍정, 원앤원북스], [나를 행복으로 이끄는 도전, 에이원북스], [6 시그마로 부자아빠 되기, 네모북스], [행복한 사과나무 이야기, 아름다운사회] 가 있으며, [꿈과 성공이 있는 명품인생] 이라는 오디오북을 발간하였습니다. 2007년 헤럴드 경제가 주최하는 한국의 아름다운 사람’ 20인에 선정된 바 있습니다.

집필 및 칼럼에 대한 문의 및 의뢰는 khajoh@naver.com, 홈페이지: www.akh.co.kr, 블로그: www.doctorahn.co.kr, 페이스북:www.facebook.com/kwanghoahn1, 트위터:www.twitter.com/kwanghoahn

 

[과학과의 통합을 위한 그의 독창적 행보]

l  6 Sigma Black Belt 획득

l  STRONG(직업흥미프로그램) 전문가 획득

l  한국심리학회 MBTI 전문가 획득

l  에니어그램 수련

l  Habiram Sprituality Training Course (영성심화수련)

l  위빠사나 명상 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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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산다는 게 뭘까?_안광호_의식경영연구회

실천경영칼럼 2014.09.11 18:41

 

< 산다는 뭘까?>

" 산다는 뭘까?"

누구나 관심을 가지지만, 정답은 없고 그래서 일반화 없는 주제다. 하지만 삶이라는 무대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어떤 감정들을 통해, 우리는 스스로의 삶이 대체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뭔가 꼬여가고 있는지를 판단할 뿐이다. 물론 판단들도 지극히 주관적이며, 생각이 바뀜에 따라 환경의 변화와 상관없이 변할 수가 있다.

 

경험을 빗대어 이야기 보라면, 환경 보다는 환경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태도가 삶의 질을 결정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살러 왔을까? 여러 이야기를 있겠지만, '사랑을 배우러 왔다' 라고 고백하는 프랑스의 '피에르 신부' 말을 나는 좋아한다. 이렇듯이 정답이 없는 하지만 아주 중요한 주제의 이야기를 오늘은 볼까 한다. 화두의 특성상 지극히 개인의 경험을 통한 한시적 결론임을 먼저 밝혀 둔다. 하여 이야기는 단지 개인의 생각에 대한 기록일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않으며, 그러하기에 더욱더 논쟁거리가 되지는 못한다.

 

1) 시작과 끝을 아는가? 아니면 여기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적이 있는가?

삶의 시작의식은 태어남이요, 끝의 의식은 죽음이다. 주제에 관해 특히 죽음에 관해 사람들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육체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다고? 거짓말 하지 말기를. 단지 그대가 죽음을 아주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지 않거나, 주제를 담대하게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피하는 것일 뿐이다. 물론 종교나 영적 믿음으로 죽음을 초월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삶의 여러 사건들 속에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도사리고 있다. 적어도 지구에서의 세속적인 삶을 살아가는데 죽음을 초월한 이가 있다면 그는 어떤 두려움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정말로 "에잇! 죽기 밖에 하겠어!" 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산다면 현재의 삶과는 아주 다른 그것을 살고 있을 것이다.

 

눈치 보며 살지도 않을 것이고, 거절 당할까 두려워하지도 않을 것이며,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도 초월할 것이다. 자기의 소신대로, 자기의 색깔대로 당당하게 삶을 살아가는데 아무런 제약과 두려움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삶이 실의에 빠져 바다에 투신 자살하려 했던 사람이 생각을 고쳐먹고 밑바닥에서 다시 재기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삶의 고비마다 예전 같으면 "내가 이런 것을 어떻게?" 라고 하며 망설였는데 다음부터는 "죽으려 했는데 정도를 못해!" 하면서 가뿐하게 고비를 넘을 있었다고 했다.

 

태어남이 있으면, 죽음이 있다.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언제고 죽음은 우리에게 통보하지 않고 우리를 데려간다. 그래야 삶이 재미있지 않을까? 언제 어디서 데려가는지 안다고 생각하면 삶은 끔찍하거나 아주 재미없을 것이다. 통상적으로 늙고 병들어 생적 기능이 하면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렇지만은 않은 것이 오늘 아침 먹고 길거리 나가다가 변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정말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르지만 죽을 후회 없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야 겠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려면 삶을 아주 살아야 한다.

 

나아간다면, 죽음에 대한 진지한 사유를 통해, 철학과 영성을 만날 있다. 과정에서 '삶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진정한 ' 대한 나름의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다. 이런 물음들을 가지고 사는 삶과 그냥 하루 다람쥐 바퀴 돌듯이 사는 그것과는 비록 같은 일을 하더라도 삶의 질은 천양지차 다를 밖에 없지 않을까? 삶에서 물음을 가지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물음이 나를 크고 넓고 깊게 성장시킬 것이기에.

 

2) 진짜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일까? 몸이 나인가? 그렇다면 몸이 없어지면 내가 없어지는 것인가? 뇌가 나인가? 그렇다면 뇌가 죽으면 내가 진짜로 죽는 것인가? 심장을 뛰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름, 직업, 역할, 인종, 국민 등이 나인가? 아니면 생각이 나인가? 그렇다면 생각을 바꾸게 하고, 생각을 지켜보는 다른 나는 누구인가? 아니면 나는 단지 여러 개의 생각을 가진 자아의 조합일 뿐인가? 그렇다면 몸이 죽을 자아들도 소멸하고 마는 것인가? 그래서 나도 정말로 없어지는 것인가? 머리가 복잡한가? 살아가기도 바쁜데 이런 문제들로 골치 썩이기 싫은가? 그렇다면 한다고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는가? 무딘 톱으로 나무가 베어지지 않는다고 불평하는 나무꾼에게 나그네가 톱을 갈아보라고 하니, 나무 시간도 없는데 톱을 시간이 어디 있느냐고 타박하는 나무꾼이 혹시 당신은 아닌가? 내가 누구인지 아무도 알려줄 없다. 우물까지 데려가는 것은 누군가가 물음으로 던져줄 있지만 우물물을 마시는 것은 당신이어야한다. 없이 있음의 세계, 상대성을 초월한 하나됨의 세계, 어느 곳도 아닌 여기, 어느 때도 아닌 지금의 경험을 보시길. 참나를 알고 사는 삶과 그렇지 않은 삶은 또한 천양지차.

 

3) 진짜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신해철의 넥스트라는 그룹이 부른 노래 제목처럼, "니가 니가 진짜로 진짜로 원하는게 뭐야? 뭐야? 뭐어야?" 들에 꽃들을 보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는데, 하나 하나 살펴보면 마다의 색깔과 향기가 있다. 가장 다운 색깔과 향기는 무엇인가? 우리네 교육은 이런 것을 물어주지 않았다. 물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말살했다고 봐야 한다. 사회에 적응 하는 수재만 만들었는데, 이는 교육의 반독재와 횡포가 아닐까 싶다. 부모도 선생도 아이들도 성적을 올려야 하는지, 성적을 올리면 정말로 행복한지, 그리고 무엇이 진짜로 성공인지 고민도 보지 않고 양육되고 있다. 자기 색깔, 목소리, 향기 내면서 조화를 이뤄 사는 법을 알아야 하는데 공장에 풀빵 찍어내듯이 똑같이 찍어내니 이를 어찌할꼬. 남들 눈치보느라 자기 하고 싶은 것도 못하고 사는 삶이 억울하지 않은가? 자기 얼굴에 맞는 가면 쓰지 않고 억지로 가면 가져다가 쓰고 다니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 물음을 보면서 어떤 감정이 올라오는가? 찹찹한가? 나는가? 숨만 나오는가? 늦었다고 포기하는가? 체념하는가? 하루를 살아도 가슴이 뛰는 펄떡이는 생선처럼 살아보면 어떨런지. 너무 많이 벗어나 이제 어떻게 수도 없다고 변명하고 싶은가? 되돌리기에 너무 벗어나 버린, 너무 늦어버린 인생은 없다. 다시 태어난다면 그렇게 살아보겠다고 피하지 마라. 지금 즉시 행동하지 않으면 다음은 없다. 삶의 소소한 것에서 내가 진짜로 원하는지 물어보고 행하라. 그런 매력을 발산하라! 자기 색깔과 향기와 소리를 내면 그것은 살아도 죽어 있는 것이다. 뭔가 근사한 같은데 끄는 매력이 없다. 밋밋 덤덤. 아무도 당신을 그렇게 살도록 몰지 않았다. 부모의 기대, 사회의 이목, 우리의 교육, 물론 얼마간 영향은 미쳤다. 하지만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선택한 것은 당신이 아닌가? 당신 인생이다.

 

4) 감정을 어떻게 다루는가?

삶은 관계를 통한 사건의 연속이고, 과정에서 다양한 감정들을 만난다. 감정은 어떤 환경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니고, 어떤 일에 대한 생각과 견해로 인해 생긴다. 그러니 감정을 헤아리다 보면 자기의 알게 되고, 그것들을 객관적으로 봄으로써 다룰 있게 된다. 생각과 감정의 노예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주인으로 사는 것이다. 그러면서 진짜 나를 어렴풋하게나마 찾아간다. 살면서 생각과 감정에서 자유로울 있다는 것은 엄청난 힘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는 속고 있다. 감정의 원인을 외부로 돌린다. 환경 , 탓을 하는 것이다. 절대 속지 마라. 세상에는 화날 , 슬픈 , 기쁜 일이 따로 없다. 단지 있을 뿐이다. 일을 누구는 철저하게 슬픈 , 화날 , 우울한 일이라고 믿고 산다.

 

감정을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에 휩싸이거나 그것을 왜곡시켜 버린다. 억압, 투사, 전이, 회피는 감정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행태다. 억압을 살펴보자. 억압은 감정의 에너지를 억지로 누르는 것이다. 결국 나중에 가서 본인도 주체할 없을 정도로 감정이 폭발하게 된다. 그것은 감정의 다이너마이트다. 부정적 감정의 억압은 관계나 심지어 존재의 종말을 이끌기도 한다. 감정의 억압과 분노는 몸의 면역체계 또한 망가뜨린다. 과도하게 억압된 스트레스는 아주 위험하다.

 

회피는 감정의 문맹인 감맹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스스로 감정을 대면할 자신이 없기 때문에 감정에 대한 감각을 닫아버린다. 사람이 감정을 느낄 없다면 기계와 다를 바가 있을까? 감정을 느끼는 감각은 영성으로 가는 관문이다. 스스로 감맹의 길을 걷고 있다면, 삶이라는 무대를 통해서 의식의 성장을 이룰 수가 없다. 이런 이들은 관계가 피상적으로 겉돌고 만다. 자기의 이야기를 모르고, 자신의 감정이 무엇인지를 다른 사람들이 감지한다. 감정을 느끼는 감각에 대한 차단은 억압만큼이나 그래서 위험하다. 감맹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능력을 배울 수가 없다.

 

투사와 전이는 우리가 감정을 다루는 가장 보편적인 방식이다. 모든 부정적 감정의 원인을 탓으로 돌림으로써 일단 죄책감과 불편한 마음에서 벗어난다. 하지만 대가로 의식의 성장은 이룰 수가 없다. 이들의 관계는 파국을 치닫게 마련이다. 이들은 부정적 감정을 투사함으로써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다. 하지만 진실은 뭔가? 모든 감정의 원인은 탓이다. 이는 어느 종교의 고상한 구호가 아니고, 영적 심리적 진실이다. 앞서 이야기 처럼, 어떤 감정은 어떤 일에 대한 해석에 의해서 생긴다. 부정적 감정이 생긴다는 것은 내가 그런 패턴에 걸려 있다는 뜻이다. 그것을 알아차리면 그것에 걸려 들지 않을 묘책을 깨닫는다. 그런데 원인을 내가 아니라고 하니, 순간을 모면하려다 계속 덫에 걸려들게 된다. 같은 수법으로 계속 당하고 있으니 어리석고 안타까울 뿐이다.

 

그럼, 어떻게 감정을 대면해야 하는가? 감정에 휩싸이지 말고, 무의식적으로 감정을 드러내지 말고, 감정을 의식의 세계로 끌고 와야 한다. 감정이 있는 그대로 올라오게 놔두고 바라보는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면, 들숨과 날숨에 따라서 감정을 느끼며 온전히 집중하는 것이다. 생각이 다른 곳으로 그대를 이끌 테지만 다시 감정에만 집중한다. 감정에 무엇이라 이름 부치지 않고 그냥 바라보면 좋지만 그것이 된다면, 예를 들어 그것이 '분노' 라면, 들숨에 '분노', 날숨에 '분노' 라고 속으로 되뇌이며 집중하는 것도 좋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30분만 집중하면 감정은 온전히 사라진다. 이런 식으로 감정을 만나주면 그러한 감정을 일으켰다고 믿었던 상대를 만나도 그런 감정은 일어나지 않는다. 사랑의 힘이 강해지면 상대 또한 의식적 무지와 가난에 의해 그렇게 행동했음을 이해하게 된다. 예수는 이를 두고, "하나님 저들은 자기들이 잘못하고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라고 말했다. 이렇게 감정을 만나다 보면 어떤 관계에서 나타나는 반복적인 부정적 감정의 패턴이 과거의 상처 때문인 것도 깨닫게 된다. 그러면 상태로 돌아가 앞서 이야기한대로 감정을 만나고 놓아주면 된다. 이렇게 연습을 하면 감정을 다루는데 능수능란해진다. 그리고 올라오는 부정적 감정과 감정을 일으키는 역할을 상대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 갈등에 의한 부정적 감정이 내가 부족함을 그래서 성장할 길을 알려주는 축복의 선물로 이해하게 된다. "모든 감사!" 라는 구절이 비로소 몸으로 체화된다.

 

5) 즐기기 위해 다양하게 접촉하고 공부하라

끌림이 있는 것들을 망설임 없이 행하라! 아무도 그것을 막을 없다. 우리에게는 '자유의지' 의한 선택권이 있음을 명심하라. 신이 우리에게 전적인 자유의지를 주었는지 생각해보라. 앞서 이야기한 감정과 상처의 치유를 통해 사랑에서 올라오는 근원적 '끌림' 발견하게 것이다. 그러한 것들을 접촉하는데 아낌없는 시간을 투자해라.

"사랑하면 알게되고, 알면 보이니 그때는 예전과 같지 않다"

, , 체의 밥을 골고루 먹어야 한다. 음악도 만나고 미술도 만나고 철학도 만나고, 영성도 만나는 것이다. 접촉점을 위한 공부와 사람과의 교류를 넓혀 나가는 것이다. 그러한 시도들이 우리의 삶을 아주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삶은 종합예술이다. 머리중심의 '' 로만 사는 것도 아니고, 가슴 중심의 '' 으로만 사는 것도 아니며, 중심의 '' 로만 사는 것도 아니다. 편식없이 골고루 보면서 자신의 지력, 체력, 덕력을 키워가야 한다. 그것이 두루 원만한 , 둥글디 둥글어 넘어가는 복된 삶이다.

 

6) 나와 관계한 모든 것에 그리고 순간에 최선을 다하라.

최선이란 무엇인가? 조정래 작가는 최선의 정의를 '스스로 감동할 만큼 혼과 몸을 바쳐 무엇을 하는 상태' 라고 했다. 스스로 감동과 전율을 느낄 만큼 관계에서 최선을 다하는가? 최선을 다하는 삶은 미련과 후회가 없다. 어떤 사건에 미련이 남는다는 것은 내가 그것에 온전히 붙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난다. 정말로 최선을 다해 살았다면 언제 어떻게 죽어도 점의 미련도 없을 것이다. 금강경에 "응무소주이생기심 (머무는 없이 마음을 내다)" 이라는 말이 있다. 최선을 다하되 집착하지 마라. 마음을 내는 것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고통은 그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생긴다.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래 가지려 하고, 싫다고 생각하는 것은 밀어내려고 하는 마음이 바로 고통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나타나고 사라짐' 연속이다. 그것은 현상계의 변하지 않는 법칙이다. 그러니 나와 인연이 닿아 나타났을 최선을 다해 관계하고, 그것이 다하면 미련없이 놓아주어야 한다. 이미 현실은 떠나버렸는데 아니라고 잡고 있으면 새롭게 오는 인연을 반갑게 맞이하지 못한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지나가 버린 과거를 후회하고, 오지 않는 미래를 걱정하며 정장 순간 만나는 모든 (일이나 사람)에도 최선을 다하지 못한다. 그렇게 살다보니 현재는 어느 후회뿐인 과거로 전락하고 만다. 오호, 통재라!

 

7) 전적으로 긍정하고 감사하라!

나에게 일어난 어떤 , 특히 우리의 머리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은 그대로 받아들일 밖에 없다. 가슴 아프고 야속하게 들리지만 그래야 한다. 이미 일어나 버린 일이다.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고 진실이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은 진실에 대한 부정이다. 거짓의 기반 위에 살겠다고 발버둥치면 결국 내가 미쳐버린다. 정신이상으로 미친 사람들의 경우가 이렇다. 이미 일어나 버렸는데 아니라고, 아니라고 울부짖다 보니 도저히 견뎌서 그런 방향으로 버린 것이다. 어떤 일이 뜻대로 안되었다고 낙심하는가? 그렇다면 내가 과연 최선을 다했는지 먼저 물어보라! 부족함이 있다면 최선으로 다음에는 도전하면 된다. 그런데 최선을 다했는데도 일어난 일이라면 그것은 하늘의 뜻이다. 전적으로 감사하게 받아들여라. 그것은 때로는 우리의 머리로 이해되지 않는 다른 차원에서 이뤄지는 일일 있다. 그렇게 감사와 긍정으로 삶에 일어난 일들을 만나게 , 일은 일이 일어나기에 가장 합당한 때에 일어났구나 하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때로 순간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그런 어떤 섭리가 있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절대긍정과 절대감사는 우리의 의식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다.

 

8) 나가 아닌 우리, 그리고 영적인 삶에 관심을 가져라.

우리 몸은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의 존재는 결국 돌아가 하나가 된다. 세상의 종교들은 진실하나를 알리고자 했다. 성경, 불경, 도덕경, 그리고 우리의 고유사상인 천부경 또한 그런 세계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것을 말로 없는 세계다. 깨친 자는 말을 없고, 하는 순간 진리와 멀어진다고 했다. 그래서 모든 경전들은 '메타포(비유)' 들어 우리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우리의 존재에 대한 관심은 사실 저절로 생긴다. 우리가 살러 것도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다. 그런데 사는데 정신이 팔려서 우리는 존재를 잃어버렸다.

"Self Forgetting"

앞서 말한 물음 하나만 바로 잡아도 결국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이끌림을 받게 것이다. 어차피 돌아갈 고향이다. 연어처럼 우리의 마음씨앗 속에는 그곳을 그리워 하는 강력한 장치가 들어 있다. 다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스스로 만든 사심의 장막으로 빛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앞의 이야기들 모두 사심의 장막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우리는 지구별에 왔을까?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배우기 위해서 왔다고 나는 생각한다. 신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을까? 인간은 자유의지로 신을 배반하기도 하지 않는가? 이는 인간존재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유가 없이 사랑을 배울 수가 있겠는가? 사랑은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가능하다. 그러니 필요충분하게 자유가 있어야 한다. 점을 헤아려보면 결국 자유는 의식의 진보를 통해 궁극적 사랑과 하나가 되는데 사용되어질 가장 기쁘고 가치가 있는 것임을 있다. 정화되어 있다면 점을 명확하게 깨칠 것이다.

 

산다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지만 40 초입에 내가 생각하는 ' ' 이런 경험적 깨침으로 이뤄져 있다. 물론 답은 한시적이고, 가변적이다. 당연히 답은 그래야 한다. 아마도 10 뒤에 글을 본다면 부끄러워 지워버리고 싶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것만이 아니라, 그만큼 내가 성장했음에 스스로 기뻐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작은 경험들이지만 인연이 닿아 글을 보는 사람들의 마음에 줄기 빛으로 다가온다면 정말 감사할 것만 같다. 사랑으로 온전히 하나되는 우리를 생각하며..

 

안광호

주제어:감정, 에고, 생각, 명상

khajoh@naver.com

[칼럼니스트 소개]

안광호 박사는 포항공대 전자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삼성전자에서 5년 동안 통신용 반도체를 개발했습니다. 그 중 5제품을 양산하여 국가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세계최초로 CDMA1 Chip Transceiver 를 개발한 경험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2006년부터,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국가연구소인 '전자부품연구원'에서 팀장으로 근무하며, 국가의 미래 먹거리 창출을 기획하고, 선도형 기술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잘산다는 것이 뭘까? 에 대한 순수한 탐구욕을 가지고 있으며과학의 바탕위에 심리의 지평을 열고, 영성으로 하나가 되는 의식의 통합에 깊은 관심이 있어 이에 대한 연구와 수련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알아차림, 매일경제신문사], [소프트마인드, 비전과리더십], [마음세수, 예문당], [삼성붕괴시나리오, 다산북스], [열다섯 살 꿈의 시크릿, 미래지식], [긍정, 원앤원북스], [나를 행복으로 이끄는 도전, 에이원북스], [6 시그마로 부자아빠 되기, 네모북스] 10여권이 있습니다.

문의 및 의뢰는 khajoh@naver.com, 홈페이지: www.akh.co.kr, 블로그: blog.naver.com/khajoh 페이스북:www.facebook.com/kwanghoahn1, 트위터:www.twitter.com/kwanghoahn

 

[과학과의 통합을 위한 그의 독창적 행보]

l  6 Sigma Black Belt 획득

l  STRONG(직업흥미프로그램) 전문가 획득

l  한국심리학회 MBTI 전문가 획득

l  초기 원형 에니어그램 수련

l  위빠사나 명상 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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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를 만난다는 것_안광호_의식경영연구회

실천경영칼럼 2014.08.22 02:00

 

<욕구를 만난다는 >

' 별로 하고 싶은 없어요.'

예전에 전국의 고등학생들을 상대로 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신기했던 것이 서울에서 가까울수록 아이들이 애늙은이 처럼 힘이 없고, 삶에 대한 의욕, 나아가 미래에 자기가 하고 싶은 꿈이 없었다. 자기 꿈이 아닌 엄마나 선생님이 주입한 꿈이거나, 그냥 성적만 올려 놓으면 뭔가 되겠지 하는 수준이었다.

 

요즘 들어 나는 이와 똑같이 꿈이 없는 어른들을 자주 만난다. 명문대를 나오고 남들이 선망하는 좋은 직장에 들어갔지만, 정작 직장에서 하고 싶은지에 대한 그림을 그린다. 나는 하고픈지에 대한 '그림 '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회사의 팀원들에게도 그림 만은 요구한다. 리더의 역할은 팀원들의 그림 장을 헤아리고 살펴 모두가 하나로 뭉칠 있는 그림 장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림 장을 그리는 친구들이 있다. 내가 담은 조직은 이랬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바람을 담은 그림을 이야기 없다면, 나로서는 적잖게 당황스러울 밖에 없다. 팀원으로서 함께 하고 싶은 그림이 없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팀에 애정이 없는 것인가? 그렇다면 팀을 떠나겠다는 것인가? 아니면 내가 물어 주지 못한 것인가? 나는 그이를 무시하고 팀을 이끌어야 하는가? 그도 아니면 언제까지 그를 기다려야 하는가? 많은 생각이 올라올 밖에 없다.

 

이렇게 지내면 가슴이 뛰겠다는 그림을 그릴 있을 , 자신의 욕구와 삶의 가치를 발견할 있다. 욕구, 뭔가 하고 싶다는 것은 집착만 하지 않는다면 아주 좋은 것이다. 그것은 생명력, 우리를 살아있게 하고 우리를 우리답게 하는 원동력이다. 욕구가 없음은 생명력이 없음, 그것은 살지만 죽어 있음이다. 소위 말해서 남들이 선망하는 좋은 학교와 직장을 다니면서 이렇게 삶에 흥미를 느끼는 친구들이 많아지는가?

 

나는 원인을 우리의 교육에서 찾는다. 우리의 교육은 물어주지 않는다. 정답을 강요하기 바쁘다. 물어주지 않는다는 것은 강요한다는 거다. 그렇게 아이들은 길들여진다. 성적을 올리면, 여하튼 성적만 올리면 이후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 가르친다. 돈을 많이 벌고, 그것도 오래 있는 직업은 무조건 좋은 것이라 주입한다. 여기에 피상적인 자기관찰이나 흥미 정도를 버무려 학교와 직업을 선택한다. 이런 부모나 선생들은 무책임하다. 자기가 보지 않은 길을 마치 진실인양 주입시키기 때문이다. 자녀와 제자들의 가슴 뜀은 고려하지 않고 그냥 성적만 일단 올리면 행복할 것이라 이야기 한다. 아이들은 자기와 대화하고 자기의 순수한 욕구를 알아차리지 못한다. 아니 이들은 아예 그것을 묻는 법을 잊어버렸다.

 

막상 원하는 것을 얻었는데, 가슴은 뛰지 않는다. 이들은 당황한다. 뭔가 멋진 것이 있을 알았는데, 막상 보니 아무 것도 없다. 약간 화도 나고 사기 당한 같은 느낌도 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돈도 많이 주고 좋은 직장이니 그냥 다니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러다 번씩 이게 도대체 뭔가? 인생은 이런가? 의문이 올라온다. 자기와 만날 있는 값진 시간이다. 하지만 대면하기가 두렵다. 모든 것을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러니 그냥 질문을 애써 무시한다. 그리고 다른 대안들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일이 삶이다. 용기 있게 자기를 다시 만날 것인가? 아니면 열정 없는, 살지만 살아 있는 같지 않은 삶을 것인가?

 

욕구를 찾아라. 그것은 나의 생명력, 나의 길을 찾는 것이다. 신이 부여한 인간의 가장 특권은 '자유의지' . 스스로 자신의 , 만의 길을 찾는 것이다. 내가 길을 만날 , 우리는 가슴이 뛴다. 그렇게 다움을 회복하고 색깔과 향기를 찾는다. 생기지 않아도 이런 사람들은 다른 이를 들뜨게 하는 매력이 있다.

 

'Find My Way!'

안광호

주제어:감정, 에고, 생각, 명상

khajoh@naver.com

[칼럼니스트 소개]

안광호 박사는 포항공대 전자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삼성전자에서 5년 동안 통신용 반도체를 개발했습니다. 그 중 5제품을 양산하여 국가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세계최초로 CDMA1 Chip Transceiver 를 개발한 경험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2006년부터,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국가연구소인 '전자부품연구원'에서 팀장으로 근무하며, 국가의 미래 먹거리 창출을 기획하고, 선도형 기술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잘산다는 것이 뭘까? 에 대한 순수한 탐구욕을 가지고 있으며과학의 바탕위에 심리의 지평을 열고, 영성으로 하나가 되는 의식의 통합에 깊은 관심이 있어 이에 대한 연구와 수련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알아차림, 매일경제신문사], [소프트마인드, 비전과리더십], [마음세수, 예문당], [삼성붕괴시나리오, 다산북스], [열다섯 살 꿈의 시크릿, 미래지식], [긍정, 원앤원북스], [나를 행복으로 이끄는 도전, 에이원북스], [6 시그마로 부자아빠 되기, 네모북스] 10여권이 있습니다.

문의 및 의뢰는 khajoh@naver.com, 홈페이지: www.akh.co.kr, 블로그: blog.naver.com/khajoh 페이스북:www.facebook.com/kwanghoahn1, 트위터:www.twitter.com/kwanghoahn

 

[과학과의 통합을 위한 그의 독창적 행보]

l  6 Sigma Black Belt 획득

l  STRONG(직업흥미프로그램) 전문가 획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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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기쁨_피에르신부_안광호_마음산책_의식경영연구회

독서리뷰 2014.08.08 01:30

 

 

[단순한 기쁨, 피에르신부]

 

 

'피에르신부'

프랑스 인들 사이에서 금세기 최고의 휴머니스트라고 일컬어진다. 1912년 프랑스 상류층에서 태어났으나 모든 유산을 포기하고 카푸친 수도원에 들어간 사람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레지스탕스로 활동했으며, 전쟁 후에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권력, 정치적 야심이 많은 인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참전의 이유 또한 '타인과 공감하는 자' 로서 배타적이고 편협한 인종주의로 서로 싸우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국회의원이 된 것도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한계를 직시하고 직접 그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만든 '엠마우스' 라는 빈민구호 공동체는 집 없는 사람, 부랑자, 그리고 전쟁고아들의 안식처를 마련하는 것이었는데, 현재 44개국 350여 개의 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2007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프랑스 북부 에스테빌에 잠들어 있다.

 

이상이 책에 나온 저자에 대한 설명이다. 내가 이 책을 고른 것은 법정 스님의 추천사 때문이다. 그가 프랑스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삶 속에서 영성을 실천하는 행동 때문일 것이다. 영적의식의 고양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 존재의 영적의식의 고양은 비록 그가 은둔해 있다 할 지라도 인류 전체의 큰 빛으로 영향을 미친다. 많은 침묵의 영성가들이 있었고, 그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인류의 의식에 큰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일반 대중들은 피에르 신부 처럼, 그들의 현장에서 직접 고통을 함께 나누는 실천적 영성가들을 더 따른다. 테레사 수녀가 사랑을 받은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피에르 신부는 삶 속에서 그가 믿는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려 했다. 그는 때로는 살생을 전제로 하는 전쟁의 참여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충분히 오해받을 수 있을 정치활동도 했다. 하지만 이런 활동들이 더 빛이 나는 이유는 그는 이 모든 것을 오롯이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 만으로 행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사심이 있었다면 그는 오히려 참전이나 정치활동으로 인해 타락을 했을 것이다. 온전한 사랑이라면 비록 살생이라도 용서 받고 이해받으며, 어떠한 업보도 남기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온전한 사랑의 마음이 되기 힘들거나 또는 자기의 사심을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라고 이름 부치며 행해진 사심 가득한 행동들이 대부분이라서 그렇지만 말이다. 이상과는 달리 실재에서 종교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대부분의 전쟁은 다 따지고 보면 개인이나 집단의 사심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서로 무고한 아이들을 죽이고, 보복을 하는 모습들을 보라.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의 아들, 딸 이라 자처하면서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기승전결이라는 어떤 줄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연대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역사적 사실 보다는 각 시기별로 피에르 신부가 삶 속에서 행했던 사랑의 행위에 대해서 함께 공감해 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듯 하다. 하여 그의 자서전에서 가슴에 공명을 일으키는 문구 위주로 내 생각을 풀어가며 이 책의 리뷰를 적을까 한다.

 

"타인은 지옥이라고 사르트르는 썼다. 나는 마음 속으로 그 반대라고 확신한다. 타인들과 단절된 자기자신이야말로 지옥이다."

 

사르트르는 자기(에고)라는 것을 하나의 허상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한 인간의 감정은 타인들의 행위에 지배를 받는 것으로 보았다. 어떤 행동을 했는데 타인들이 인정을 하고 칭찬을 하면 나라고 생각하는 존재의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듯이 한 존재의 행복은 타인들이 가지고 있는데, 이런 연유로 타인은 지옥이라고 사르트르는 말했다. 사르트르 자신은 그래서 다른 사람의 시선에 무심하려고 무던 애를 썼다. 하지만 무관심하려고 애를 쓰는 것 조차 하나의 관심임을 깨닫고 스스로 찾고자 했던 바람직한 인간관계의 답을 결국은 찾지 못했다.

 

사르트르는 일단 존재 자체를 생각과 관념의 에고로 보았는데, 이것이 그가 범한 첫번째 오류다. 우리의 존재는 생각과 관념의 에고 너머에 있다. 그러하므로 진정한 나의 존재는 단지 있을 뿐, 생각이나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또한 애당초 나와 남의 구별조차 없다. 이것이 영적통찰을 통한 존재의 재발견이고 진실이다. 이런 진실을 사르트르는 거부했다. 스스로 분리와 개체화를 인정하고 말았다. 진실과 다른 가정을 진실이라 상정하고 그 안에서 해답을 찾으러 했기에 그의 사상은 치열했을지는 모르나 한편 공허한 메아리였을 것이다. 영적통찰이 빠진 실존은 그래서 허무하다.

 

남이 나와 단절될 때, 각자는 생각과 관념의 틀로 만난다. 자기 안의 생각들도 시간이나 사건에 따라서 바뀔 수 있기에, 그 유한성으로 인해 인간들은 스스로 불안하고 두려워한다. 또한 틀과 틀이 부딪히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갈등이 생긴다. 나의 틀을 나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나의 틀이 진실이라고 믿으려는 성질이 있다. 서로가 자기가 믿는 신념이 진실이라고 우길 때, 타인과의 만남은 고통이 될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더 나아가 타인과 나를 분리시키고 단절시킨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신과의 분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신을 대상화함으로써 신을 배신했으며, 그로 인해 벌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과 죄의식에 떨고 있다. 나와 남이 틀을 넘어 사랑으로 만날 때 이 모든 것은 초월된다.

 

"엠마우스 공동체의 세 가지 규칙, 1) 우리가 먹을 것은 우리가 노동해서 번다. 2) 우리는 모든 것을 나눠 가진다. 3) 베푸는 사람이 되는 사치를 누리기 위해 사는데 충분한 정도 이상의 노동을 한다."

 

먹을 것을 노동을 통해서 번다. 한 때는 이런 것을 전근대적인 경제활동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스코트 니어링/헬렌 니어링' '조화로운 삶' 이라는 책을 보고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스스로 자급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불안하다. 과연 생산성과 경제성만이 행복하고 풍족한 삶의 전부일까? 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 지구는 그 안에 속한 인류를 먹여 살리기에 충분한 자원과 에너지, 그리고 작물들이 있다. 하지만 과잉생산과 낭비, 독점, 사치와 같은 인간의 욕심들이 이러한 조화로움을 망쳐놓았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후손들이 사용해야 할 것 까지도 다 뽑아쓰고 있다. 절약과 함께 나눠씀이라는 생태학적 관점은 고려되지 않고, 내가 힘이 있으니 마음껏 쓰고, 마음대로 버린다는 생각이 대부분이다. 북미대륙에서 유럽인들이 단지 가죽을 얻기 위해 그 수많은 버팔로들을 도륙해서 대륙 전체가 고기 썩는 냄새로 진동하던 광경을 인디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방식의 서구문명화가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다.

 

내가 노동을 통해 나의 먹거리를 재배할 수 있다는 것은 일면 원시적인 듯 하지만 여러 잇점이 있다. 일단 스스로 먹여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통해 삶이 안정된다. 또한 공기, 햇살, 바람, 대지의 은혜로움과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철학을 몸으로 깨닫는다. 절기에 따라 농사를 지음으로써 순응과 받아들임을 배울 수 있고, 인간의 자만심을 내려놓고 더 큰 섭리가 있음을 이해한다. 자고로 옛부터 농사를 오래 지어온 농부들은 생활 철학자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함께 지구가 우리에게 베푸는 은혜로움을 골고루 만끽할 수 있다. 햇살이 사람을 가리지 않고 비추듯이 말이다. 이런 삶은 부의 과도한 집중과 그로 인한 폐해도 막을 수 있다. '러스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라는 책에서, 만일 마을에 부자가 있어도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다 스스로 노동을 해서 자급할 수 있다면 스스로 나서서 부자의 집에 들어가 노동을 할 이유도 없고, 결국 부자도 하인들을 부릴 수 없어 직접 농사를 지을 수 밖에 없어, 부의 독과점의 폐해를 줄일 수 있다고 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과거로 돌아가 농사를 짓자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분명히 직접 먹을 거리를 재배해 봄으로써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황폐함에 대한 정신적 치유를 얻을 수 있기에, 작은 텃밭이라도 가꾸면서 자연과 먹거리, 그리고 생태와 조화에 대해서 깨닫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좋을 것이라 본다. 인도의 간디가 왜 자급자족을 강조하며 스스로 물레를 돌렸는가? 그 행위를 통한 정신적 자립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엠마우스 공동체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은 듯 하다. 무엇보다 사회의 부적응자, 부랑자라고 하는 이들이 스스로 생산한 것으로 남을 도움으로써, 각자의 존재가치를 한껏 드높여 삶을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볼 수 있다는 측면은 고무적이다. 인간은 다른 존재를 도움으로써 말로 다 할 수 없는 참 기쁨을 느낀다. 그 기쁨은 하나의 샘물이며, 나를 더 생명력 있게 가꾼다. 사랑은 스스로의 사랑을 통해 더욱 더 커진다. 신이 우리에게 자신을 배반할 수 있음을 알고도 자유의지를 준 것은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 사랑을 더욱 더 키우기 위해서다. 공동체의 부랑자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살아갈 방편 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 일 것이다.

 

"곤경에 처했다는 의식이 있을 때에만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다."

시련과 고난이라 불리는 장벽을 만날 때, 우리는 겸손해진다. 이제 뭔가를 들을 준비가 된 것이다. 젊을 때의 손쉬운 성공은 인생을 망치는 지름길이라 했다. 오만하고 방자하며 자신의 성공에 대한 신념으로 남의 이야기, 더 나아가 신적 소명을 외면한다. 이게 평생 그 사람의 틀이 되는 순간, 이 사람에게 성공은 하나의 큰 걸림돌일 뿐이다. 하고자 하는 바가 모든 것에 막혀 버릴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내 삶을 뒤돌아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내 뜻대로 다 되는 세상은 원래 없음을 알게 되고, 그렇다면 내 뜻이 아닌, 더 큰 뜻은 뭘까에 귀 기울이게 된다. 들을 준비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의 구원은 시작된다. 결국 나를 내려놓고 온전한 합일, 사랑 가득 하나임을 경험할 기본이 이제야 갖춰진 것이다.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고 죽어야만 한다고 제자들에게 직접 설명을 했음에도, 베드로가 그럴 리가 없다고 하자. 예수가 사탄아 물러가라.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뜻을 하나님 뜻이라 우긴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 뜻이 서로 배치되는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난다. 우리는 너무 자주, 또한 너무 쉽게 '하나님'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무엇보다 자기의 욕심이나 사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결국 하나의 신의 이름으로 입에 담지도 못할 전쟁들이 일어나고는 한다. 반성하고 또 반성해야 한다.

 

"삶은 누군가에게는 부조리고, 누군가에게는 신비다."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할 신비다. 이는 나를 영적인 세계로 이끈 스승님이 즐겨 쓰신 말씀이었다. 우리는 기적을 바란다. 예수께도 기적을 기대했다. 하지만 예수의 말씀 자체가 나는 기적이라고 본다. 물 위를 걸었다느니, 육적 부활을 했다느니, 죽은 이를 살렸다느니 그런 것들에 열광하고 집착한다. 왜 그런 것들에 그토록 집착하는가? 그 보다 수억 배나 더한 가치가 있는 말씀들에 왜 감동받지 못하는가? 삶에 마술을 기대하는 의식, 그 의식은 아직 샤머니즘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반증은 아닐까? 삶 또한 그렇다. 삶에 기적을 바라는가? 삶에 마술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잘 살펴보면 삶 자체가 기적이고 신비다. 단지 내 눈이 멀고, 내 귀가 들리지 않아 못 알아차릴 뿐이다.

 

"우리는 왜 이 땅에 태어나는 걸까? 그것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함일 것이다."

참 아름다운 문구다. 왜 사는가? 돈 벌려고? 돈 벌어서 뭐하게? 우리의 삶이라는 것, 매일 매일 관계의 연속. 사람을 만나고 일을 만나고, 그 안에서 많은 감정들을 경험하고, 또 그렇게 성장하고 또 때로는 퇴행하며.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해 간다. 관계의 연속인 삶에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그저 아무 생각없이 바쁘기만 하다면, 그것은 다람쥐 쳇바퀴와 뭐가 다를 것이 있을까?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왜 주었나? 그 자유의지로 인간은 신을 배척하고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를 준 것은, 능동적으로 사랑하라는 뜻이 아닐까? 자유가 없이 어떻게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자유의지로 인한 온갖 폐해에도 불구하고 사랑 한 몸짓의 에너지가 그 모든 것을 다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사랑은 또한 사랑함으로써 더 커지는 속성이 있다. 사랑 그 자체인 신이 바라는 것도 결국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줌으로써 사랑을 더 풍성히 가꾸기 위함이 아닐까? 대신 우리의 마음 깊숙이 신을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달리 말하면 사랑하고 사랑 받을 때 기쁨이 샘솟도록 어떤 씨앗 하나(신성의 빛)를 주신 듯 하다. 그것을 잘 알아차리고 그 섭리대로 향할 때, 우리는 기쁨이 넘친다. 신바람이 난다. 물론 에고의 강한 장막으로 그 빛을 가리며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를 자기 멋대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런 삶에서는 결코 참다운 기쁨을 발견할 수 없다.

 

"나는 있는 자, 그로다"

'I AM' 나는 아브라함 이전 부터 있는 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그 어느 때도 아닌, 지금! 그 어느 곳도 아닌 여기에 있는 자, 태어난 적도 없고 따라서 죽을 수도 없는 그런 나! 그 나를 깨달은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 있는 자! 말미암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깨치지 못하리. 그 나는 빛이요, 생명이요, 부활이다. 예수가 아브라함 이전 부터 있다고 했을 때, 바리새인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의 말을 개미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 처럼. 하여, 성경의 말씀, 그 안에 들어 있는 여러 메타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을 드 높여야 할 터. 그런 과정 없이 성경 말씀을 곧이 곧대로만 듣는 다면, 때로 그것은 너무 맹목적이고, 때로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나는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

있다고 믿는 것은, 억지, 맹목일 수 있다. 이해로 깨치면 저절로 샘솟는 믿음이 생긴다. 이해로 깨친 이는 믿음을 초월한다. 이해로 만날 때, 믿음은 사실과 진실이 된다. 그런 경지로 가야하지 않을까?

 

"마태복음(5, 복이 있는 사람)"

이 중 피에르 신부는 '마음이 가난한 자' '의로움 때문에 박해 받는 자' 의 경우는 바로 복을 받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미래에 복을 받는다고 나와있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럼 먼저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 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마음이 비어있다는 뜻이다. 마음이 빈다는 것은 나를 내려놓는다는 것이며, 전적으로 신의 섭리에 자기를 맡긴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럴 때 영적으로 충만해진다. 이는 즉시에 바로 이뤄진다. 사실 우리는 빛의 속성, 신적 속성, 사랑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검은 천으로 그것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그 검은 천을 걷어 버리면 원래 있어온 참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의로움' 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하늘의 질서를 따른다는 것이다. 나를 내려놓고 온전히 내맡기며 그 알아차린 바 대로 산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선택한다면 바로 이 의로움을 알아차리고 선택해야 하며, 그 알아차린 바대로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는 '아버지의 일' 을 하러 왔다고 표현을 했다. 하늘의 천명을 알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절대로 두렵거나 의기소침하지 않다. 그는 자기를 버림으로써 하늘과 하나가 되었다. 속된 말로 하나님 백을 등에 엎고 행동하는 것이니 거침이 없다. 그는 세속적인 죽음마저 초월한다. 그야 말로 진정한 도의 사람이다.

 

"동물들도 사랑을 한다. 하지만 자유없이 사랑을 한다."

인간의 사랑은 자유를 기반으로 한 사랑이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이 지구별에 왔다. 사랑은 억지로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와 자발성이 있어야 사랑을 할 수 있다. 신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 사랑을 거부할 선택을 할 수 있음에도 그 특권을 준 것은 바로 사랑의 힘을 믿기 때문이었다. 한 사랑의 힘은 수 백의 범죄(사랑 없음으로 인한 행위)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에너지가 있다. 사랑은 서로 사랑을 주고 받으면서 에너지가 확장된다. 사랑 그 자체인 신은 우리가 자유의지로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 받기를 원하신다. 그럴 때 영적충만, 기쁨이 샘솟는다. 그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누구나 그런 신성을 가지고 있다. 동물의 자유없는 사랑은 본능일 뿐이다. 그 안에는 인간의 사랑이 가지는 거룩함을 찾을 수가 없다. 인간의 자유는 하지만 아무렇게나 사용하거나 내 변덕에 따라 사용하면 할수록 자유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특성을 지녔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끔찍한 죄책감으로 인해 옴짝달싹 못하게 주눅 들었던가?"

매질하는 모습으로서의 아버지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기 생각으로 남들이 이미지화 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만난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을 만나는 것일까? 그 생각은 어디에서 왔는가? 생각으로 하나님을 만난다면, 모든 이들의 하나님이 다 다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일 뿐, 하나님 그 자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 생각을 진실이라 믿으며, 같은 종교인들끼리도 언쟁을 높인다. 하나의 코미디다.

 

도스도에프스키의 '카마라조프가의 형제들' 에서 2,000 년만에 다시 부활한 예수에게 대사제는 이야기한다.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지만 인간들은 그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할 지 모르고 있다. 그들은 자유의지로 인해 불안하다. 그래서 대사제는 그들에게 두려움과 죄책감을 심어주고 그것을 없애주는 역할을 대신 맡음으로써 종교를 부흥시켰노라 자랑한다. 자기들 성직자들은 비록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불안과 죄책감에 뜨는 인간들에게 자기들을 통하면 그러한 죄를 사할 수 있다는 면죄부를 줌으로써 평화를 주었노라고 자랑한다.

 

분명 이 책의 저자인 피에르 신부도 교권화된 종교가 부흥을 위해, 과도하게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주었노라고 개탄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상화 하고 있다. 인간의 개체의식 속에는 신과의 분리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스스로 대체화 함으로써 지혜를 얻었을 지는 모르나, 그로 인해서 신과의 분리,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죄책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나를 온전히 내려놓고 완전한 합일을 이룰 때만 이러한 죄책감과 두려움은 없어진다. 그런데 기존의 교회들이 이런 인간 근원의 두려움을 오히려 부추겨 사적인 세력확장에 이용한 측면이 분명히 있다. 피에르 신부를 이를 직시한 것이다.

 

"네 복음서와 신약의 모든 글들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씌어진 것도, 성령에 의해 석판에 씌어진 것도 아니다."

이 부분은 첨예하고 민감한 이슈다. 하지만 위의 글은 사실이다. 성경을 쓴 이가 예수의 의식이 아닌 이상, 그리고 온전히 자기를 내려놓지 않은 이상, 사사로운 사심이 들어갔을 수가 있다. 이것을 인정하느냐 아니냐? 이것을 인정하는 순간, 성경의 권위가 훼손된다는 측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를 절대적 지주로 삼는 종교에는 하나의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예수 사후에 그것도 예수의 사도들의 제자들 그룹에서 씌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수가 살아계셨을 때, 12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의식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하물며 그 후대의 제자들의 경우는 어떠하겠는가? 그러니 오직 이것만이 절대적 진리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지는 잘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이상으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마친다. 나에게 공명을 일으킨 부분들에 대해서만 기술해 보았으니, 책의 내용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한 번 일독해 보기를 권한다.  

안광호 (khajoh@naver.com)

[주제어]: 단순한 기쁨, 피에르신부, 마음산책

 [리뷰어 소개]

안광호 박사는 포항공대 전자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삼성전자에서 5년 동안 통신용 반도체를 개발했습니다. 그중 5제품을 양산하여 국가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세계최초로 CDMA1 Chip Transceiver 를 개발한 경험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2006년부터, 지식경제부산하 국가연구소인 '전자부품연구원'에서 팀장으로 근무하며, 국가의 미래 먹거리 창출을 기획하고, 선도형 기술을 개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