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게 길을 묻다_김용규_안광호_의식경영연구회

독서리뷰 2014.09.22 02:00

 

 

[숲에게 길을 묻다, 김용규]

 

 

'요즘 부쩍 숲에 관심이 간다.'

누군가 어떤 때에 뭔가에 꽂힐 때가 있다. 요즘 내게 그 대상은 '' 이다. 출 퇴근 가능한 거리에 온전히 숲이 보존된 곳에 평생의 '' 와 나에게 맞춤 같은 집을 짓고자 늘 알아보고 있는 요즘이다. 그런가 하면 언제 시작할 지는 아직 모르지만, '나무 클라이밍' 에 대한 관심도 새롭게 생겼다. 새롭게 생겼다기 보다는 늘 숲에 관심이 있다가 이런 것도 있구나 하고 접촉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겠다. 늘 그래왔듯이 매일 새벽 나는 뒷산 숲 속을 산책하고 뜀박질을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이뿐인가? 한 달에 한두번은 아이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야영을 한다. 나는 언제나 그래왔다. 숲이 그냥 좋았다.

 

숲 속에서 살면서 자기 밥벌이 까지 할 수 있을까? 가끔씩은 이런 생각들을 한다. 아마도 은퇴 후에는 밥벌이는 모르겠으나 좀 더 숲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은 분명하다. 이런 나에게 어떤 책이 한 권 손에 잡혔다. 그냥 저자가 숲을 택한 방식이 좋아서 그의 책을 읽어 보았다. 이 책의 저자 '김용규' 는 별난 사람이다. 별나다기 보다는 제대로 된 사람이라 칭하고 싶다. 자기 색깔대로 살겠다고 선언한 그런 용기있는 인물이다. 이런 사람들이 별나다고, 또 용기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 요즘은 작태다. 그 만큼 사람들에게 일은 밥벌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언제 우리의 공교육과 사교육이 뭐가 나에게 가장 가슴 뛰는 일인지에 대해서 물어 주기나 했던가? 맹목적으로 성적만 올려 놓으면 저절로 다른 것은 따라오겠지 하고 여겼지만 세상 일이 어디 그렇던가? 단지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살고 있으니 서로 위안 삼고 살아갈 뿐.

 

김용규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자. 그는 대기업에서 분사한 벤처회사의 CEO 였다. 전후 사정은 모르지만 30대의 나이에 CEO 를 맡길 정도라면 상당한 능력이 있는 엘리트였을 것이다. 그런 그가 마흔의 길목에서 도시의 삶과 CEO라는 달콤한 타이틀을 버리고 숲으로 갔다. 그리고 '백오산방' 이라는 숲 속 오두막에 살며,  '행복한 삶을 배우는 숲 학교' '행복숲 공동체' 를 만들고 있다. 숲에 살다보니 어느 새 숲의 가르침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런 자기만의 통찰을 이 책을 통해 대중들에게 전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태어남, 성장함, 나로 살기, 돌아가기' 4 장으로 이뤄져 있다. 인생전반의 굵직한 주제들을 숲 속의 나무, , 바람으로 부터 얻은 통찰로 풀어가고 있다. 이 책의 서두에 적어 놓은 이 한 문장은 꽤 자극적이며, 우리를 가슴뛰게 하는 뭔가가 있다.

 

'길 위에 서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길을 잃은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그의 글은 차분하다. 차분하지만 설득력이 있고 가끔씩 사람을 뒤흔드는 구석이 있다. 그의 글에서는 또한 '고 구본형' 선생의 냄새가 난다. 아니나 다를까? 김용규 또한 어떤 식으로든 구본형 선생과 깊은 인연을 맺은 듯 하다. 구본형 선생의 글은 사람의 마음을 마구 뒤흔드는 강렬한 힘이 있다. 그 힘이 너무 강하다 보니 한가지 아쉬운 것은 그의 문하생들의 글에서 그의 글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는 점이다. 김용규의 책에서는 그나마 그런 부분들이 잘 절제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사회적인 '' 만 존재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노라 했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학교와 숲이 좋았다고 한다. 단순하지만 강렬한 욕망을 담아 그는 숲에서 '무면허 선생' 노릇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숲의 속삭임에 따라 자연을 보았으되 그 자연과 하나되어 보았노라 고백했다. 되어본다는 것, 온전히 그것과 하나가 되기 위한 전초 과정이나, 나를 내려놓음이 없이는 결코 그리 되지 않을 것이니, 저자의 그릇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삶은 나 라는 생명에게 깃든 위대한 자기완결의 힘을 믿는 한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다.'

 

자기완결의 출발은 끌림을 알아차리는 데 있다. 그리고 그 끌림에 온전히 자기를 맡길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알아차림은 쉬운 듯 하지만, 쉽지 않다. 시장 바닥의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은은하게 하지만 내 가슴을 이끄는 한 소절의 음악을 찾는 격이다. 먼저 세상이 정해 준, 내가 생각으로 만든 나를 내려놓아야 끌림을 알아차릴 수 있다. 잘 듣고, 잘 보기로 다짐하고 실천하는 것이 자기완결, 그리고 영성의 출발이다.

 

[1막 태어나다]

'모든 생명은 자기답게 살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

우리도 그렇다. 그렇게 살지 말라고 막는 이는 아무도 없다. 심지어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 를 주었다. 신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막을 수 없다. 그 만큼 우리는 선택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힘은 잘 헤아려야지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선택의 힘을 가지고 얼마나 가슴뛰는 삶을 살고 있는가? 자기답게 살 때, 아름다움이 넘친다. 아름다움은 '알음' '다움' 의 준말이다. 스스로 잘 헤아려 자기다움을 찾고, 알아차린 대로 내 모든 것을 다 바칠 때, 진정 존재는 아름답게 느껴진다. 씨앗은 나무의 꿈을 가지고 태어나, 나무로 자란다. 하물며 사람이랴! 하지만 눈이 멀어 우리는 나 대로의 삶을 사는 것 마저 어려워한다. 비근한 예로 내가 속한 직장에는 세계 최고의 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근무하는 연구원들이 많다. 그들이 꿈을 잃고 방황하는 모습, 더구나 그 와중에서도 스스로 연구원 생활의 이상적인 그림 하나 못 그리는 현실은 개탄스럽기까지 하다. 철학이 빠진 학문은 유치하며, 맹목적이며, 위험하다.

 

자기의 길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단 걸어야 한다. 바로 자기의 길을 찾기는 힘들다. 하지만 일단 걷기 시작하면 여기에 막히고, 저기에 걸려 보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다. 머리로 고민해 봐야 나아지는 것은 없다. 인간은 언제나 길을 잃음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길을 찾는다. 저자가 인용한 데이빗소로우의 말 처럼, "길을 잃어보기 전에는 자신을 찾아내지도 지금 서 있는 위치와 자신이 맺고 있는 무한한 관계를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숲에는 태어난 자리를 억울해하는 생명이 없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실천하는 용기와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는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의 기도문이 생각난다. 평생 환경 탓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미 그렇게 주어진 것이다. 불평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은 진실이고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삶의 회피,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삶을 언제까지 살 것인가? 거부하면 할 수록 세상과 점점 더 고립될 뿐이다. 누구도 염세주의자와 관계 맺기를 원하지 않는다.

 

숲의 생명체는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일단 받아들임을 전제로 자신의 삶을 시작한다. 바위에 소나무 씨앗이 발아되었다고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 이리 저리 몸을 틀어 생명을 키우다 보니 멋진 낙락장송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남과의 싸움이라기 보다는 온전한 자기 자리에서의 자기극복이다. 우리 삶도 사실 그렇다. 남과의 경쟁이라고 하지만 그 남을 통한 자기의 성장과정이지 않을까? 남을 통해서 내 부족함을 알아차리고 또 한 발짝 성장의 발을 내딛는 것 말이다. 그의 책의 표현처럼 누구도 자신의 하늘을 열지 못하면 머지 않아 죽음을 맞을 뿐이다.

 

받아들임은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론이 아니다. 사실 운명이란 나쁜 말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런 뜻으로 사용해서 그렇지, 운명에는 변화와 역동이 포함되어 있다. 즉 나 스스로 능동적으로 내 삶을 개척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론을 새롭게 '고명론(固命論 고착된 명이론)' 이라 부르자. 태어난 자리를 바꿀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진정한 긍정이다. 그 받아들임 이후에 자신의 삶의 방향과 갈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것이 어찌 운명론인가? 오히려 자신의 태어난 자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평하면서 움직일 수 있는데도 가만히 땅에 엎드려 있는 것이 비겁한 운명론(고명론)이 아닐까?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할 때, 이런 사람들은 삶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린다. 자신의 길을 못 찾으니 남들 가자는 데로 이리 저리 휩쓸린다. 스스로 주인됨을 잃어버리고 노예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바꿀 수 없는 숙명을 받아들이고 운명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2막 성장하다]

'나무에게는 빛, 사람에게는 꿈'

저자의 고백부터 들어보자. 그 고백은 가슴을 들뜨게 하는 매력이 있다. 이런 유혹하는 글쓰기의 원조는 그의 선생, 구본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빛을 잃은 나무가 시들듯이, 꿈이 없었던 저자의 삶에 대한 묘사다.

 

"하루의 삶은 늘 바빴고 이러저러한 사회적 관계는 현란했으며 외양은 고왔으나, 내 영혼은 참 초라하구나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가? 외양도 초라하고, 내 영혼도 초라하거나, 둘 다 풍성하거나 어느 하나가 초라하거나 일 것이다. 모두 풍성하지 않다면 일단정지! 잘 듣고 잘 살피고, 또 잘 헤아려 자신의 길, 자신의 꿈을 찾아야 한다. 우리 교육은 꿈을 묻지 않는다. 성적만 올려놓고 보자는 식이다. 꿈을 물어주지 않아 꿈이 없는 아이들에게 성적만을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압박이다. 동기부여가 전혀 되지 않는 것이다. 말 잘 듣고 막상 좋은 대학교, 좋은 직장 다녀보니 이게 아닌데 하는 자괴감과 이 사회에 사기를 당했다는 느낌마저 든다.

 

'담담하게 지니고 있는 상처야말로 그다운 향기다'

나이가 들수록 멋있는 사람이 있다. 얼굴이 잘생긴 것도 돈이 많은 것도 아닌데, 바라보면 볼수록 멋있는 이가 있다. 뭐랄까? 겉 멋이 아닌 속에서 우러나오는 멋이 느껴지는 그런 사람 말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그 만의 독특하고 은은한 향내가 난다. 이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다 상처와 시련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봄에 산수유가 핀다. 그런데 아파트 단지에 심어진 산수유 꽃에는 향기가 별로 나지 않는다. 하지만 산속에서 자란 야생의 산수유 꽃에서는 아주 진한 향기가 난다. 홀로 긴 겨울의 눈보라의 시련을 거치면서 단련된 탓이리라.

 

저자는 자신을 음나무를 닮았다고 했다. 젊은 시절 자기는 그렇게 가시를 달고 살았노라 했다. 왜 가시를 달고 사는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는 그 만큼 자신이 약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흔히 분노와 같은 부정적 감정이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 볼 때는 강한 것 같아도 속은 약하기 짝이 없는 것도 같은 이치다. 하지만 음나무를 관찰해 보니, 어느 정도 자라면 가시를 떨어뜨린다고 했다. 어린 나무일 때는 순이 약해서 새나 짐승들의 먹이가 될 까봐 가시라는 방어막을 쳤지만 자기가 어느 정도 자랐다고 생각하니 가시가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것이다. 저자도 그렇게 성장을 했다. 분노라는 가시를 계속 가지고 있기 보다는 자기를 성장시키는 에너지로 재활용 한 것이다. 데이비드호킨스 박사의 '의식혁명' 을 보면 분노를 잘 승화시킬 때 창조에너지로 거듭남을 알 수 있다. 한편 저자는 분노라는 가시를 가득 단 사람을 만나더라도 너무 미워하지 말고, 그 안에 자신을 지키려는 에너지가 고독하게 흐르고 있음을 알아주라고 한다. 그 마음 씀이 참 착하다.

 

'다퉈라! 그러나 제대로 다퉈라!'

신은 생명을 지속하는 강력한 원리의 하나로 경쟁이라는 장치를 두었다. 하지만 인간의 경쟁은 변질되었다. 일단 자연의 경쟁은 정정당당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의 길을 위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련의 과정일 뿐이다. 그것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갖기 위한 투쟁이다. 이는 자신과의 아름다운 다툼일 뿐이다. 저자의 말처럼 수 많은 이웃의 욕망이 충돌하는 수직의 공간에서 자기의 하늘을 확보할 힘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목숨을 걸고 생명을 유지하려 한다. 우리는 어떤가? 궁극적으로 자신과의 투쟁임을 망각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그래서 때로는 부정도 서슴지 않는 치졸한 싸움판일 뿐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목숨을 걸 만큼 최선으로 덤비느냐 그것도 아니다. 누군가의 이익을 빼앗고 누르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 아님을 우리의 가슴은 알고 있다.

 

'성장을 위한 아름다운 생명의 그물망'

삶은 관계다. 우리의 삶은 수 많은 관계와 그 관계 속에서의 선택과 만남으로 이뤄져 있다. 일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영성과의 관계 등. 삶의 기술은 그래서 관계의 기술이다. 관계를 하다보면 삐걱 거리는 지점이 있다. 내가 두루 원만하지 않음을 알려주는 그래서 삶의 기술을 더 발전시켜야 할 지점인 것이다. 저자의 이 책에서 숲 속 생명체들의 관계성과 공생이 놀랍게 다가왔다. 예를 들어 열매를 새에게 제공함으로써 새의 배설물을 거름으로 씨앗을 발아하게 하는 나무의 삶이 그랬다. 이런 씨앗들에는 씨앗을 보호하는 막이 있어, 새가 소화를 할 때에 그 시간에 맞춰서 막이 녹게 된다고 했다. 이들의 공생은 자신을 온전히 내어 줌으로써 이뤄진다는 점에서 훨씬 더 극적이고 감동적이다. 정말 우리 인간도 온전히 누군가의 밥이 됨으로써 새롭게 성장할 수 있는 그런 관계성을 맺을 수 있을까?

 

[3막 나로서 살다]

'각자에 맞는 유혹기술을 키워라'

꽃이 수정을 맺는 방법은 크게 3가지다. 바람을 매개로, 곤충을 매개로, 또는 새를 매개로 하는 것이 그것이다. 개암나무를 위시한 풍매화는 바람을 매개로 해야 하기에 꽃 하나에 보통 500만 개의 꽃가루를 담을 수 있다. 바람을 기다리고 바람에게 말을 걸어 자신의 꽃가루를 날려보내 수정을 이룬다는 것은 얼마나 극적인가? 그 확률낮음 에서 종족을 번식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수의 꽃가루를 생산하는 것이다. 풍매화의 꽃은 수수한데, 굳이 벌이나 새들을 유혹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가장 적합한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개 중에는 무려 5,000 킬로미터를 날아서 수정을 한다고 하니 기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에 반해 우리가 자주 보는 충매화는 벌이나 나비 같은 곤충을 매개로 한다. 하여 꽃 색깔이 화려하고 향기가 진하다. 벌이나 나비를 유혹해야 수정에 성공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각각의 꽃이 작고 볼품이 없다면 집단으로 꽃을 피워 자신을 알린다. 조팝나무나 싸리나무 등은 대표적이다. 심지어 산딸나무라는 녀석은 그것도 모자라 잎의 색깔마저 꽃 모양처럼 보이게 위장을 해서라도 곤충들을 유혹한다. 벌은 꿀을 얻기위해 꽃을 찾는다. 꽃은 꿀을 내어주고 꽃가루를 벌이나 나비의 다리에 자주 무쳐야 한다. 하여 꽃들은 꿀의 위치를 알기 쉽게 알려주기도 한다. 이런 유색의 선을 '허니가이드' 라고 부른다. 이들의 유혹은 강렬하고 또 배려심이 깊다. 병꽃나무나 인동덩굴의 경우 수정이 이뤄진 뒤에는 색을 바꿔 곤충의 수고를 덜어주고, 또 복수초는 안쪽의 온도를 높여 아직 추운 이른 봄, 곤충들을 따뜻하게 해 준다고 한다. 심지어 유카꽃이나 무화과꽃은 유카나방이나 무화과 말벌에게 알을 낳을 공간까지 제공한다고 한다. 댕강나무는 또한 수정이 이뤄지면 향기를 거둬들이는데 이 또한 곤충에 대한 사려깊은 배려라 할 수 있다.

 

책에서는 찰스다윈의 이 말이 나온다.

"자연은 영구적인 자가수분을 혐오한다"

자가수분은 공멸의 지름길이다. 조선의 학자들이 고려가 왜 멸망했는지를 조사해 보니 근친결혼이 큰 원인이었다. 하여 동성동본간의 결혼을 엄격히 금지 시켰다. 우리들도 자신들의 영역만 고집하고 이 안에서만 소통이 이뤄진다면 식물의 자가수분처럼 조만간은 함께 공멸할 것이 예측된다.

 

자기의 색깔과 향기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남 눈치보며, 사회가 짐 지워진 것에만 매달리다 보면 서서히 자기의 색깔과 개성을 잃어버린다. 우리 교육이 지금 이렇다. 맹목적으로 공장에서 아이들을 찍어 내듯이 적당하게 모든 것들을 잘 하는 수재로 만들려 한다. 목적과 방향도 없이 성적을 올리면, 성공을 한다는 식이다. 과연 그 성공은 누구를 위한 성공인가? 사람이 자기다움을 잃어버릴 때, 향기를 잃어 버리고 그 사람의 매력은 떨어진다. 내 주변에는 아주 학벌 좋은 친구들이 많다.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친구들이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미국의 명문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이곳으로 왔다. 하지만 그 중에는 정말 자기 인생의 가슴뛰는 그림 한 장 없이 수동적으로 사는 친구들도 있다. 그들은 삶에 대해서 스스로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수준도 가십거리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관계성과 갈등이슈에 대한 처리를 힘들어하고 틀에 짜여진 일 이외에는 잘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수 십년을 투자해 전공지식을 쌓았을지는 모르나 삶의 철학이 없기에 공허한 메아리 처럼 들린다.

 

우리는 얼마나 매력적이고 유혹적인가? 유혹과 매력은 자기의 길을 가는 것에서 나온다. 그런가 하면 앞서 이야기 한 나무들은 얼마나 배려심이 깊은가? 우리 스스로가 충분히 매력적이며, 관계성에 있어 또한 넉넉하게 배려심도 크다면 어느 누가 우리를 좋아하지 않겠는가? 반성하고 또 배워나간다.

 

'사랑의 방식, 연리목과 혼인목'

책의 내용을 보자. 사람의 만남이 인연이라면 나무의 인연은 차라리 숙명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공간을 공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안에서 연리지가 이뤄낸 사랑은 숭고하다. 자신의 살을 내어주지 않고는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살을 에는 아픔을 딛고 일어서야만 이뤄지기 때문이다. 바람이 수시로 방해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런 숭고한 사랑을 이룬다. 연리목의 사랑이 있는가 하면, 혼인목의 사랑도 있다. 그것은 나도 있으면서 그도 있는 사랑이다. 연리목이 제 살을 내어주며 하나로 합일하는 사랑이라면, 혼인목은 서로의 가지를 떨어뜨려 서로의 공간을 열어주는 사랑이다.

 

우리는 얼마나 이런 사랑을 자주 하는가? 감각적이고 열정의 사랑이 끝나면 서로 함께 내어주어 하나를 이루는 그런 숭고한 사랑은 온데간데 없다. 서로의 살을 내어주기는 커녕, 자기만의 틀에 갇혀 대화는 단절된다. 부부라고 하나 그냥 형식적인 관계로 치닫는 사람들은 또한 얼마나 많은가? 스스로 많이 반성해 볼 일이다.

 

'홀로서기'

책에는 큰오색딱따구리의 자식사랑에 대해서 나온다. 새끼들이 둥지를 떠나야 할 때 엄마 새는 더 이상 새끼들에게 체온을 남겨주지 않으며, 아빠새도 이별을 준비하는 순간부터 새끼들의 둥지에 머물지 않는다. 새끼들을 내 보내는 것이 그들을 위한 더 큰 사랑임을 알기 때문이다. 둥지를 떠나는 순간 푸른 하늘은 그들의 것이 되고, 그런가 하면 폭풍우가 치고 눈이 쏟아지는 하늘도 그들의 것이 되리라. 하지만 그렇게 새끼들을 보내고 아빠새는 몇 시간 동안 나무 전체를 더듬으며 새끼가 아직 나무 근처에 있지는 않는지 찾는다. 새끼의 둥지를 떠나 숲으로 사라지는 아빠새의 입에는 마지막으로 전해주고자 했던 먹이가 그대로 물려 있었다고 한다. 나무들도 마찬가지다. 단풍나무는 씨앗에 프로펠러를 달아 자식을 더 멀리 보내며, 소나무도 씨앗이 발 아래에 떨어질 위험을 피하려 한다. 도꼬마리나 도깨비바늘은 동물들의 털에 씨앗을 붙임으로써 자식들을 멀리 보낸다.

 

오직 인간만이 자식을 끼고 내 보내려 하지 않는다. 그게 사랑인 줄 알지만 결국 자식을 성장시키지 못하고 망치는 지름길임을 알고 있을까? 이것은 뭐랄까? 사랑을 가장한 부모들의 욕심일 뿐이다. 그 안에는 자식을 영원히 자신의 손아귀에 두려 하거나, 아니면 자식을 통해 자신의 제 2의 인생을 투영하려는 욕심이 있을 수도 있다. 사랑을 가장한 이들의 통제는 무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어 본인도 알아차리기 힘들다. 따라서 아주 교묘하기까지 하다. 자식이 스스로 성장할 수 없게 자식이 해야 할 일을 다 챙겨줌으로써 자신에게 평생 의존하게 만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자기를 떠나려 하면 양심의 가책과 죄의식을 느낄만한 행동을 한다. 부모가 다 큰 자식들을 내보내지 않고 이것 저것 해 주기 시작하면, 자식들은 또 나름대로 무의식 속에 '내가 뭔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 부모님이 나를 이렇게 돌보는구나' 하며 위축감과 결핍감을 느낀다. 지금 물어보라. 정말 자식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자식에 대한 나의 보살핌은 내 욕심 때문은 아닌지? 그로 인해 자식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지?

 

'죽음'

이 책의 내용을 먼저 살펴보자.

'죽음을 두려워 마라. 두려워할 것은 오히려 살고 있으되 살아 있음에 철저하지 못하고 죽음의 때에 이르러서도 그 죽음에 철저하지 못한 우리의 삶이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일은 신이 그대에게 부여한 삶과 죽음의 기회를 헛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왜 그런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짜 내가 누군지를 안 사람은 죽음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처음 부터 태어나지도 않은 그래서 죽을 수 없는 그 '' 를 발견하면 그렇게 된다. ! 너무 거창한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좀 세속적으로 들어가보자. 나는 늘 언제고 기쁘게 죽을 준비를 하라고 말하고 싶다. 언제 우리의 몸이 죽음을 맞이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을 안다면 또 인생이 재미없지 않겠는가? 모르니 재미있고, 또 모르니 그나마 열심히 사는 것 아닐까? 여하튼 언제고 죽음이 다가올 때, 기쁜 얼굴로 참 잘 살았구나 하며 그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삶을 아주 잘 살아야 한다. 그래서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삶을 허투루 살지 않는다. 순간 속에 최선으로 자기를 이뤄내는 그런 성장의 사람으로 산다면 죽음은 하나의 아름다운 축제가 될 것이다. 이상으로 이 책의 리뷰를 마친다.

안광호 (khajoh@naver.com)

[주제어]:숲에게 길을 묻다, 김용규,

 [리뷰어 소개]

안광호 박사는 포항공대 전자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삼성전자에서 5년 동안 통신용 반도체를 개발했습니다. 그중 5제품을 양산하여 국가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세계최초로 CDMA1 Chip Transceiver 를 개발한 경험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2006년부터, 지식경제부산하 국가연구소인 '전자부품연구원'에서 팀장으로 근무하며, 국가의 미래 먹거리 창출을 기획하고, 선도형 기술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잘산다는 것이 뭘까? 에 대한 순수한 탐구욕을 가지고 있으며과학의 바탕위에 인간의 심리와 의식세계를  통합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글로 풀어가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알아차림, 매일경제신문사], [소프트마인드, 비전과리더십], [마음세수, 예문당], [삼성붕괴시나리오, 다산북스], [열다섯 살 꿈의 시크릿, 미래지식], [긍정, 원앤원북스], [나를 행복으로 이끄는 도전, 에이원북스], [6 시그마로 부자아빠 되기, 네모북스], [행복한 사과나무 이야기, 아름다운사회] 가 있으며, [꿈과 성공이 있는 명품인생] 이라는 오디오북을 발간하였습니다. 2007년 헤럴드 경제가 주최하는 한국의 아름다운 사람’ 20인에 선정된 바 있습니다.

집필 및 칼럼에 대한 문의 및 의뢰는 khajoh@naver.com, 홈페이지: www.akh.co.kr, 블로그: www.doctorahn.co.kr, 페이스북:www.facebook.com/kwanghoahn1, 트위터:www.twitter.com/kwanghoahn

 

[과학과의 통합을 위한 그의 독창적 행보]

l  6 Sigma Black Belt 획득

l  STRONG(직업흥미프로그램) 전문가 획득

l  한국심리학회 MBTI 전문가 획득

l  에니어그램 수련

l  Habiram Sprituality Training Course (영성심화수련)

l  위빠사나 명상 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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