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게 길을 묻다_김용규_안광호_의식경영연구회

독서리뷰 2014.09.22 02:00

 

 

[숲에게 길을 묻다, 김용규]

 

 

'요즘 부쩍 숲에 관심이 간다.'

누군가 어떤 때에 뭔가에 꽂힐 때가 있다. 요즘 내게 그 대상은 '' 이다. 출 퇴근 가능한 거리에 온전히 숲이 보존된 곳에 평생의 '' 와 나에게 맞춤 같은 집을 짓고자 늘 알아보고 있는 요즘이다. 그런가 하면 언제 시작할 지는 아직 모르지만, '나무 클라이밍' 에 대한 관심도 새롭게 생겼다. 새롭게 생겼다기 보다는 늘 숲에 관심이 있다가 이런 것도 있구나 하고 접촉되었다고 보는 편이 맞겠다. 늘 그래왔듯이 매일 새벽 나는 뒷산 숲 속을 산책하고 뜀박질을 하며 하루를 시작한다. 이뿐인가? 한 달에 한두번은 아이와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야영을 한다. 나는 언제나 그래왔다. 숲이 그냥 좋았다.

 

숲 속에서 살면서 자기 밥벌이 까지 할 수 있을까? 가끔씩은 이런 생각들을 한다. 아마도 은퇴 후에는 밥벌이는 모르겠으나 좀 더 숲 속에서 많은 시간을 보낼 것은 분명하다. 이런 나에게 어떤 책이 한 권 손에 잡혔다. 그냥 저자가 숲을 택한 방식이 좋아서 그의 책을 읽어 보았다. 이 책의 저자 '김용규' 는 별난 사람이다. 별나다기 보다는 제대로 된 사람이라 칭하고 싶다. 자기 색깔대로 살겠다고 선언한 그런 용기있는 인물이다. 이런 사람들이 별나다고, 또 용기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 요즘은 작태다. 그 만큼 사람들에게 일은 밥벌이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언제 우리의 공교육과 사교육이 뭐가 나에게 가장 가슴 뛰는 일인지에 대해서 물어 주기나 했던가? 맹목적으로 성적만 올려 놓으면 저절로 다른 것은 따라오겠지 하고 여겼지만 세상 일이 어디 그렇던가? 단지 다른 사람들도 다 이렇게 살고 있으니 서로 위안 삼고 살아갈 뿐.

 

김용규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자. 그는 대기업에서 분사한 벤처회사의 CEO 였다. 전후 사정은 모르지만 30대의 나이에 CEO 를 맡길 정도라면 상당한 능력이 있는 엘리트였을 것이다. 그런 그가 마흔의 길목에서 도시의 삶과 CEO라는 달콤한 타이틀을 버리고 숲으로 갔다. 그리고 '백오산방' 이라는 숲 속 오두막에 살며,  '행복한 삶을 배우는 숲 학교' '행복숲 공동체' 를 만들고 있다. 숲에 살다보니 어느 새 숲의 가르침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런 자기만의 통찰을 이 책을 통해 대중들에게 전하고 있다.

 

이 책은 크게 '태어남, 성장함, 나로 살기, 돌아가기' 4 장으로 이뤄져 있다. 인생전반의 굵직한 주제들을 숲 속의 나무, , 바람으로 부터 얻은 통찰로 풀어가고 있다. 이 책의 서두에 적어 놓은 이 한 문장은 꽤 자극적이며, 우리를 가슴뛰게 하는 뭔가가 있다.

 

'길 위에 서 있다고 믿지만 사실은 길을 잃은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그의 글은 차분하다. 차분하지만 설득력이 있고 가끔씩 사람을 뒤흔드는 구석이 있다. 그의 글에서는 또한 '고 구본형' 선생의 냄새가 난다. 아니나 다를까? 김용규 또한 어떤 식으로든 구본형 선생과 깊은 인연을 맺은 듯 하다. 구본형 선생의 글은 사람의 마음을 마구 뒤흔드는 강렬한 힘이 있다. 그 힘이 너무 강하다 보니 한가지 아쉬운 것은 그의 문하생들의 글에서 그의 글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는 점이다. 김용규의 책에서는 그나마 그런 부분들이 잘 절제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사회적인 '' 만 존재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노라 했다. 그 와중에서도 그는 학교와 숲이 좋았다고 한다. 단순하지만 강렬한 욕망을 담아 그는 숲에서 '무면허 선생' 노릇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숲의 속삭임에 따라 자연을 보았으되 그 자연과 하나되어 보았노라 고백했다. 되어본다는 것, 온전히 그것과 하나가 되기 위한 전초 과정이나, 나를 내려놓음이 없이는 결코 그리 되지 않을 것이니, 저자의 그릇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겠다.

 

'삶은 나 라는 생명에게 깃든 위대한 자기완결의 힘을 믿는 한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다.'

 

자기완결의 출발은 끌림을 알아차리는 데 있다. 그리고 그 끌림에 온전히 자기를 맡길 수 있을 때 가능하다. 알아차림은 쉬운 듯 하지만, 쉽지 않다. 시장 바닥의 시끄러운 소음 속에서 은은하게 하지만 내 가슴을 이끄는 한 소절의 음악을 찾는 격이다. 먼저 세상이 정해 준, 내가 생각으로 만든 나를 내려놓아야 끌림을 알아차릴 수 있다. 잘 듣고, 잘 보기로 다짐하고 실천하는 것이 자기완결, 그리고 영성의 출발이다.

 

[1막 태어나다]

'모든 생명은 자기답게 살 힘을 가지고 태어난다.'

우리도 그렇다. 그렇게 살지 말라고 막는 이는 아무도 없다. 심지어 신은 인간에게 '자유의지' 를 주었다. 신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막을 수 없다. 그 만큼 우리는 선택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힘은 잘 헤아려야지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선택의 힘을 가지고 얼마나 가슴뛰는 삶을 살고 있는가? 자기답게 살 때, 아름다움이 넘친다. 아름다움은 '알음' '다움' 의 준말이다. 스스로 잘 헤아려 자기다움을 찾고, 알아차린 대로 내 모든 것을 다 바칠 때, 진정 존재는 아름답게 느껴진다. 씨앗은 나무의 꿈을 가지고 태어나, 나무로 자란다. 하물며 사람이랴! 하지만 눈이 멀어 우리는 나 대로의 삶을 사는 것 마저 어려워한다. 비근한 예로 내가 속한 직장에는 세계 최고의 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근무하는 연구원들이 많다. 그들이 꿈을 잃고 방황하는 모습, 더구나 그 와중에서도 스스로 연구원 생활의 이상적인 그림 하나 못 그리는 현실은 개탄스럽기까지 하다. 철학이 빠진 학문은 유치하며, 맹목적이며, 위험하다.

 

자기의 길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단 걸어야 한다. 바로 자기의 길을 찾기는 힘들다. 하지만 일단 걷기 시작하면 여기에 막히고, 저기에 걸려 보면서 자신의 길을 찾아갈 수 있다. 머리로 고민해 봐야 나아지는 것은 없다. 인간은 언제나 길을 잃음으로써 자신의 진정한 길을 찾는다. 저자가 인용한 데이빗소로우의 말 처럼, "길을 잃어보기 전에는 자신을 찾아내지도 지금 서 있는 위치와 자신이 맺고 있는 무한한 관계를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숲에는 태어난 자리를 억울해하는 생명이 없다'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과 바꿀 수 있는 것을 실천하는 용기와 이 둘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달라는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 의 기도문이 생각난다. 평생 환경 탓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미 그렇게 주어진 것이다. 불평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은 진실이고 사실이기 때문에. 그것을 거부한다는 것은 삶을 거부하는 것이다. 삶의 회피, 살아도 사는 것 같지 않은 삶을 언제까지 살 것인가? 거부하면 할 수록 세상과 점점 더 고립될 뿐이다. 누구도 염세주의자와 관계 맺기를 원하지 않는다.

 

숲의 생명체는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일단 받아들임을 전제로 자신의 삶을 시작한다. 바위에 소나무 씨앗이 발아되었다고 불평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 이리 저리 몸을 틀어 생명을 키우다 보니 멋진 낙락장송으로 거듭나기도 한다. 남과의 싸움이라기 보다는 온전한 자기 자리에서의 자기극복이다. 우리 삶도 사실 그렇다. 남과의 경쟁이라고 하지만 그 남을 통한 자기의 성장과정이지 않을까? 남을 통해서 내 부족함을 알아차리고 또 한 발짝 성장의 발을 내딛는 것 말이다. 그의 책의 표현처럼 누구도 자신의 하늘을 열지 못하면 머지 않아 죽음을 맞을 뿐이다.

 

받아들임은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론이 아니다. 사실 운명이란 나쁜 말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런 뜻으로 사용해서 그렇지, 운명에는 변화와 역동이 포함되어 있다. 즉 나 스스로 능동적으로 내 삶을 개척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운명론을 새롭게 '고명론(固命論 고착된 명이론)' 이라 부르자. 태어난 자리를 바꿀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진정한 긍정이다. 그 받아들임 이후에 자신의 삶의 방향과 갈 길을 걸어가야 한다. 이것이 어찌 운명론인가? 오히려 자신의 태어난 자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불평하면서 움직일 수 있는데도 가만히 땅에 엎드려 있는 것이 비겁한 운명론(고명론)이 아닐까? 자신의 길을 가지 못할 때, 이런 사람들은 삶의 존재 가치를 잃어버린다. 자신의 길을 못 찾으니 남들 가자는 데로 이리 저리 휩쓸린다. 스스로 주인됨을 잃어버리고 노예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바꿀 수 없는 숙명을 받아들이고 운명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2막 성장하다]

'나무에게는 빛, 사람에게는 꿈'

저자의 고백부터 들어보자. 그 고백은 가슴을 들뜨게 하는 매력이 있다. 이런 유혹하는 글쓰기의 원조는 그의 선생, 구본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지만 말이다. 빛을 잃은 나무가 시들듯이, 꿈이 없었던 저자의 삶에 대한 묘사다.

 

"하루의 삶은 늘 바빴고 이러저러한 사회적 관계는 현란했으며 외양은 고왔으나, 내 영혼은 참 초라하구나 느꼈던 적이 있습니다."

 

당신은 어떤가? 외양도 초라하고, 내 영혼도 초라하거나, 둘 다 풍성하거나 어느 하나가 초라하거나 일 것이다. 모두 풍성하지 않다면 일단정지! 잘 듣고 잘 살피고, 또 잘 헤아려 자신의 길, 자신의 꿈을 찾아야 한다. 우리 교육은 꿈을 묻지 않는다. 성적만 올려놓고 보자는 식이다. 꿈을 물어주지 않아 꿈이 없는 아이들에게 성적만을 강요하는 것은 일종의 정신적 압박이다. 동기부여가 전혀 되지 않는 것이다. 말 잘 듣고 막상 좋은 대학교, 좋은 직장 다녀보니 이게 아닌데 하는 자괴감과 이 사회에 사기를 당했다는 느낌마저 든다.

 

'담담하게 지니고 있는 상처야말로 그다운 향기다'

나이가 들수록 멋있는 사람이 있다. 얼굴이 잘생긴 것도 돈이 많은 것도 아닌데, 바라보면 볼수록 멋있는 이가 있다. 뭐랄까? 겉 멋이 아닌 속에서 우러나오는 멋이 느껴지는 그런 사람 말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그 만의 독특하고 은은한 향내가 난다. 이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다 상처와 시련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봄에 산수유가 핀다. 그런데 아파트 단지에 심어진 산수유 꽃에는 향기가 별로 나지 않는다. 하지만 산속에서 자란 야생의 산수유 꽃에서는 아주 진한 향기가 난다. 홀로 긴 겨울의 눈보라의 시련을 거치면서 단련된 탓이리라.

 

저자는 자신을 음나무를 닮았다고 했다. 젊은 시절 자기는 그렇게 가시를 달고 살았노라 했다. 왜 가시를 달고 사는가?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이는 그 만큼 자신이 약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흔히 분노와 같은 부정적 감정이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 볼 때는 강한 것 같아도 속은 약하기 짝이 없는 것도 같은 이치다. 하지만 음나무를 관찰해 보니, 어느 정도 자라면 가시를 떨어뜨린다고 했다. 어린 나무일 때는 순이 약해서 새나 짐승들의 먹이가 될 까봐 가시라는 방어막을 쳤지만 자기가 어느 정도 자랐다고 생각하니 가시가 더 이상 필요 없어진 것이다. 저자도 그렇게 성장을 했다. 분노라는 가시를 계속 가지고 있기 보다는 자기를 성장시키는 에너지로 재활용 한 것이다. 데이비드호킨스 박사의 '의식혁명' 을 보면 분노를 잘 승화시킬 때 창조에너지로 거듭남을 알 수 있다. 한편 저자는 분노라는 가시를 가득 단 사람을 만나더라도 너무 미워하지 말고, 그 안에 자신을 지키려는 에너지가 고독하게 흐르고 있음을 알아주라고 한다. 그 마음 씀이 참 착하다.

 

'다퉈라! 그러나 제대로 다퉈라!'

신은 생명을 지속하는 강력한 원리의 하나로 경쟁이라는 장치를 두었다. 하지만 인간의 경쟁은 변질되었다. 일단 자연의 경쟁은 정정당당하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의 길을 위해 자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련의 과정일 뿐이다. 그것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갖기 위한 투쟁이다. 이는 자신과의 아름다운 다툼일 뿐이다. 저자의 말처럼 수 많은 이웃의 욕망이 충돌하는 수직의 공간에서 자기의 하늘을 확보할 힘을 갖는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과의 싸움에서는 목숨을 걸고 생명을 유지하려 한다. 우리는 어떤가? 궁극적으로 자신과의 투쟁임을 망각하고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그래서 때로는 부정도 서슴지 않는 치졸한 싸움판일 뿐이다. 그렇다고 자신의 목숨을 걸 만큼 최선으로 덤비느냐 그것도 아니다. 누군가의 이익을 빼앗고 누르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 아님을 우리의 가슴은 알고 있다.

 

'성장을 위한 아름다운 생명의 그물망'

삶은 관계다. 우리의 삶은 수 많은 관계와 그 관계 속에서의 선택과 만남으로 이뤄져 있다. 일과의 관계, 사람과의 관계, 영성과의 관계 등. 삶의 기술은 그래서 관계의 기술이다. 관계를 하다보면 삐걱 거리는 지점이 있다. 내가 두루 원만하지 않음을 알려주는 그래서 삶의 기술을 더 발전시켜야 할 지점인 것이다. 저자의 이 책에서 숲 속 생명체들의 관계성과 공생이 놀랍게 다가왔다. 예를 들어 열매를 새에게 제공함으로써 새의 배설물을 거름으로 씨앗을 발아하게 하는 나무의 삶이 그랬다. 이런 씨앗들에는 씨앗을 보호하는 막이 있어, 새가 소화를 할 때에 그 시간에 맞춰서 막이 녹게 된다고 했다. 이들의 공생은 자신을 온전히 내어 줌으로써 이뤄진다는 점에서 훨씬 더 극적이고 감동적이다. 정말 우리 인간도 온전히 누군가의 밥이 됨으로써 새롭게 성장할 수 있는 그런 관계성을 맺을 수 있을까?

 

[3막 나로서 살다]

'각자에 맞는 유혹기술을 키워라'

꽃이 수정을 맺는 방법은 크게 3가지다. 바람을 매개로, 곤충을 매개로, 또는 새를 매개로 하는 것이 그것이다. 개암나무를 위시한 풍매화는 바람을 매개로 해야 하기에 꽃 하나에 보통 500만 개의 꽃가루를 담을 수 있다. 바람을 기다리고 바람에게 말을 걸어 자신의 꽃가루를 날려보내 수정을 이룬다는 것은 얼마나 극적인가? 그 확률낮음 에서 종족을 번식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수의 꽃가루를 생산하는 것이다. 풍매화의 꽃은 수수한데, 굳이 벌이나 새들을 유혹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가장 적합한 방식을 선택하는 것이다. 개 중에는 무려 5,000 킬로미터를 날아서 수정을 한다고 하니 기적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에 반해 우리가 자주 보는 충매화는 벌이나 나비 같은 곤충을 매개로 한다. 하여 꽃 색깔이 화려하고 향기가 진하다. 벌이나 나비를 유혹해야 수정에 성공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각각의 꽃이 작고 볼품이 없다면 집단으로 꽃을 피워 자신을 알린다. 조팝나무나 싸리나무 등은 대표적이다. 심지어 산딸나무라는 녀석은 그것도 모자라 잎의 색깔마저 꽃 모양처럼 보이게 위장을 해서라도 곤충들을 유혹한다. 벌은 꿀을 얻기위해 꽃을 찾는다. 꽃은 꿀을 내어주고 꽃가루를 벌이나 나비의 다리에 자주 무쳐야 한다. 하여 꽃들은 꿀의 위치를 알기 쉽게 알려주기도 한다. 이런 유색의 선을 '허니가이드' 라고 부른다. 이들의 유혹은 강렬하고 또 배려심이 깊다. 병꽃나무나 인동덩굴의 경우 수정이 이뤄진 뒤에는 색을 바꿔 곤충의 수고를 덜어주고, 또 복수초는 안쪽의 온도를 높여 아직 추운 이른 봄, 곤충들을 따뜻하게 해 준다고 한다. 심지어 유카꽃이나 무화과꽃은 유카나방이나 무화과 말벌에게 알을 낳을 공간까지 제공한다고 한다. 댕강나무는 또한 수정이 이뤄지면 향기를 거둬들이는데 이 또한 곤충에 대한 사려깊은 배려라 할 수 있다.

 

책에서는 찰스다윈의 이 말이 나온다.

"자연은 영구적인 자가수분을 혐오한다"

자가수분은 공멸의 지름길이다. 조선의 학자들이 고려가 왜 멸망했는지를 조사해 보니 근친결혼이 큰 원인이었다. 하여 동성동본간의 결혼을 엄격히 금지 시켰다. 우리들도 자신들의 영역만 고집하고 이 안에서만 소통이 이뤄진다면 식물의 자가수분처럼 조만간은 함께 공멸할 것이 예측된다.

 

자기의 색깔과 향기로 살아야 한다. 그런데 남 눈치보며, 사회가 짐 지워진 것에만 매달리다 보면 서서히 자기의 색깔과 개성을 잃어버린다. 우리 교육이 지금 이렇다. 맹목적으로 공장에서 아이들을 찍어 내듯이 적당하게 모든 것들을 잘 하는 수재로 만들려 한다. 목적과 방향도 없이 성적을 올리면, 성공을 한다는 식이다. 과연 그 성공은 누구를 위한 성공인가? 사람이 자기다움을 잃어버릴 때, 향기를 잃어 버리고 그 사람의 매력은 떨어진다. 내 주변에는 아주 학벌 좋은 친구들이 많다.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친구들이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미국의 명문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따고 이곳으로 왔다. 하지만 그 중에는 정말 자기 인생의 가슴뛰는 그림 한 장 없이 수동적으로 사는 친구들도 있다. 그들은 삶에 대해서 스스로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수준도 가십거리 이상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가 하면 관계성과 갈등이슈에 대한 처리를 힘들어하고 틀에 짜여진 일 이외에는 잘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수 십년을 투자해 전공지식을 쌓았을지는 모르나 삶의 철학이 없기에 공허한 메아리 처럼 들린다.

 

우리는 얼마나 매력적이고 유혹적인가? 유혹과 매력은 자기의 길을 가는 것에서 나온다. 그런가 하면 앞서 이야기 한 나무들은 얼마나 배려심이 깊은가? 우리 스스로가 충분히 매력적이며, 관계성에 있어 또한 넉넉하게 배려심도 크다면 어느 누가 우리를 좋아하지 않겠는가? 반성하고 또 배워나간다.

 

'사랑의 방식, 연리목과 혼인목'

책의 내용을 보자. 사람의 만남이 인연이라면 나무의 인연은 차라리 숙명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공간을 공유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안에서 연리지가 이뤄낸 사랑은 숭고하다. 자신의 살을 내어주지 않고는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살을 에는 아픔을 딛고 일어서야만 이뤄지기 때문이다. 바람이 수시로 방해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이런 숭고한 사랑을 이룬다. 연리목의 사랑이 있는가 하면, 혼인목의 사랑도 있다. 그것은 나도 있으면서 그도 있는 사랑이다. 연리목이 제 살을 내어주며 하나로 합일하는 사랑이라면, 혼인목은 서로의 가지를 떨어뜨려 서로의 공간을 열어주는 사랑이다.

 

우리는 얼마나 이런 사랑을 자주 하는가? 감각적이고 열정의 사랑이 끝나면 서로 함께 내어주어 하나를 이루는 그런 숭고한 사랑은 온데간데 없다. 서로의 살을 내어주기는 커녕, 자기만의 틀에 갇혀 대화는 단절된다. 부부라고 하나 그냥 형식적인 관계로 치닫는 사람들은 또한 얼마나 많은가? 스스로 많이 반성해 볼 일이다.

 

'홀로서기'

책에는 큰오색딱따구리의 자식사랑에 대해서 나온다. 새끼들이 둥지를 떠나야 할 때 엄마 새는 더 이상 새끼들에게 체온을 남겨주지 않으며, 아빠새도 이별을 준비하는 순간부터 새끼들의 둥지에 머물지 않는다. 새끼들을 내 보내는 것이 그들을 위한 더 큰 사랑임을 알기 때문이다. 둥지를 떠나는 순간 푸른 하늘은 그들의 것이 되고, 그런가 하면 폭풍우가 치고 눈이 쏟아지는 하늘도 그들의 것이 되리라. 하지만 그렇게 새끼들을 보내고 아빠새는 몇 시간 동안 나무 전체를 더듬으며 새끼가 아직 나무 근처에 있지는 않는지 찾는다. 새끼의 둥지를 떠나 숲으로 사라지는 아빠새의 입에는 마지막으로 전해주고자 했던 먹이가 그대로 물려 있었다고 한다. 나무들도 마찬가지다. 단풍나무는 씨앗에 프로펠러를 달아 자식을 더 멀리 보내며, 소나무도 씨앗이 발 아래에 떨어질 위험을 피하려 한다. 도꼬마리나 도깨비바늘은 동물들의 털에 씨앗을 붙임으로써 자식들을 멀리 보낸다.

 

오직 인간만이 자식을 끼고 내 보내려 하지 않는다. 그게 사랑인 줄 알지만 결국 자식을 성장시키지 못하고 망치는 지름길임을 알고 있을까? 이것은 뭐랄까? 사랑을 가장한 부모들의 욕심일 뿐이다. 그 안에는 자식을 영원히 자신의 손아귀에 두려 하거나, 아니면 자식을 통해 자신의 제 2의 인생을 투영하려는 욕심이 있을 수도 있다. 사랑을 가장한 이들의 통제는 무의식에 바탕을 두고 있어 본인도 알아차리기 힘들다. 따라서 아주 교묘하기까지 하다. 자식이 스스로 성장할 수 없게 자식이 해야 할 일을 다 챙겨줌으로써 자신에게 평생 의존하게 만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식이 자기를 떠나려 하면 양심의 가책과 죄의식을 느낄만한 행동을 한다. 부모가 다 큰 자식들을 내보내지 않고 이것 저것 해 주기 시작하면, 자식들은 또 나름대로 무의식 속에 '내가 뭔가 부족한 것이 있어서 부모님이 나를 이렇게 돌보는구나' 하며 위축감과 결핍감을 느낀다. 지금 물어보라. 정말 자식을 위하는 길이 무엇인지? 자식에 대한 나의 보살핌은 내 욕심 때문은 아닌지? 그로 인해 자식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지?

 

'죽음'

이 책의 내용을 먼저 살펴보자.

'죽음을 두려워 마라. 두려워할 것은 오히려 살고 있으되 살아 있음에 철저하지 못하고 죽음의 때에 이르러서도 그 죽음에 철저하지 못한 우리의 삶이다. 정말 두려워해야 할 일은 신이 그대에게 부여한 삶과 죽음의 기회를 헛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왜 그런가? 죽음이 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진짜 내가 누군지를 안 사람은 죽음 따위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처음 부터 태어나지도 않은 그래서 죽을 수 없는 그 '' 를 발견하면 그렇게 된다. ! 너무 거창한 이야기인가? 그렇다면 좀 세속적으로 들어가보자. 나는 늘 언제고 기쁘게 죽을 준비를 하라고 말하고 싶다. 언제 우리의 몸이 죽음을 맞이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을 안다면 또 인생이 재미없지 않겠는가? 모르니 재미있고, 또 모르니 그나마 열심히 사는 것 아닐까? 여하튼 언제고 죽음이 다가올 때, 기쁜 얼굴로 참 잘 살았구나 하며 그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삶을 아주 잘 살아야 한다. 그래서 죽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삶을 허투루 살지 않는다. 순간 속에 최선으로 자기를 이뤄내는 그런 성장의 사람으로 산다면 죽음은 하나의 아름다운 축제가 될 것이다. 이상으로 이 책의 리뷰를 마친다.

안광호 (khajoh@naver.com)

[주제어]:숲에게 길을 묻다, 김용규,

 [리뷰어 소개]

안광호 박사는 포항공대 전자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삼성전자에서 5년 동안 통신용 반도체를 개발했습니다. 그중 5제품을 양산하여 국가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세계최초로 CDMA1 Chip Transceiver 를 개발한 경험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2006년부터, 지식경제부산하 국가연구소인 '전자부품연구원'에서 팀장으로 근무하며, 국가의 미래 먹거리 창출을 기획하고, 선도형 기술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잘산다는 것이 뭘까? 에 대한 순수한 탐구욕을 가지고 있으며과학의 바탕위에 인간의 심리와 의식세계를  통합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글로 풀어가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알아차림, 매일경제신문사], [소프트마인드, 비전과리더십], [마음세수, 예문당], [삼성붕괴시나리오, 다산북스], [열다섯 살 꿈의 시크릿, 미래지식], [긍정, 원앤원북스], [나를 행복으로 이끄는 도전, 에이원북스], [6 시그마로 부자아빠 되기, 네모북스], [행복한 사과나무 이야기, 아름다운사회] 가 있으며, [꿈과 성공이 있는 명품인생] 이라는 오디오북을 발간하였습니다. 2007년 헤럴드 경제가 주최하는 한국의 아름다운 사람’ 20인에 선정된 바 있습니다.

집필 및 칼럼에 대한 문의 및 의뢰는 khajoh@naver.com, 홈페이지: www.akh.co.kr, 블로그: www.doctorahn.co.kr, 페이스북:www.facebook.com/kwanghoahn1, 트위터:www.twitter.com/kwanghoahn

 

[과학과의 통합을 위한 그의 독창적 행보]

l  6 Sigma Black Belt 획득

l  STRONG(직업흥미프로그램) 전문가 획득

l  한국심리학회 MBTI 전문가 획득

l  에니어그램 수련

l  Habiram Sprituality Training Course (영성심화수련)

l  위빠사나 명상 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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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기쁨_피에르신부_안광호_마음산책_의식경영연구회

독서리뷰 2014.08.08 01:30

 

 

[단순한 기쁨, 피에르신부]

 

 

'피에르신부'

프랑스 인들 사이에서 금세기 최고의 휴머니스트라고 일컬어진다. 1912년 프랑스 상류층에서 태어났으나 모든 유산을 포기하고 카푸친 수도원에 들어간 사람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레지스탕스로 활동했으며, 전쟁 후에는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렇다고 그가 권력, 정치적 야심이 많은 인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참전의 이유 또한 '타인과 공감하는 자' 로서 배타적이고 편협한 인종주의로 서로 싸우는 것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국회의원이 된 것도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의 한계를 직시하고 직접 그들 속으로 들어갔다. 그가 만든 '엠마우스' 라는 빈민구호 공동체는 집 없는 사람, 부랑자, 그리고 전쟁고아들의 안식처를 마련하는 것이었는데, 현재 44개국 350여 개의 단체가 활동하고 있다. 2007 9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프랑스 북부 에스테빌에 잠들어 있다.

 

이상이 책에 나온 저자에 대한 설명이다. 내가 이 책을 고른 것은 법정 스님의 추천사 때문이다. 그가 프랑스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이유는, 삶 속에서 영성을 실천하는 행동 때문일 것이다. 영적의식의 고양 자체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한 존재의 영적의식의 고양은 비록 그가 은둔해 있다 할 지라도 인류 전체의 큰 빛으로 영향을 미친다. 많은 침묵의 영성가들이 있었고, 그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인류의 의식에 큰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일반 대중들은 피에르 신부 처럼, 그들의 현장에서 직접 고통을 함께 나누는 실천적 영성가들을 더 따른다. 테레사 수녀가 사랑을 받은 것도 같은 이유일 것이다. 피에르 신부는 삶 속에서 그가 믿는 하느님의 사랑을 실천하려 했다. 그는 때로는 살생을 전제로 하는 전쟁의 참여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고 충분히 오해받을 수 있을 정치활동도 했다. 하지만 이런 활동들이 더 빛이 나는 이유는 그는 이 모든 것을 오롯이 인류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 만으로 행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에 조금이나마 사심이 있었다면 그는 오히려 참전이나 정치활동으로 인해 타락을 했을 것이다. 온전한 사랑이라면 비록 살생이라도 용서 받고 이해받으며, 어떠한 업보도 남기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온전한 사랑의 마음이 되기 힘들거나 또는 자기의 사심을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이라고 이름 부치며 행해진 사심 가득한 행동들이 대부분이라서 그렇지만 말이다. 이상과는 달리 실재에서 종교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벌어진 대부분의 전쟁은 다 따지고 보면 개인이나 집단의 사심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이 서로 무고한 아이들을 죽이고, 보복을 하는 모습들을 보라. 그들 스스로는 하나님의 아들, 딸 이라 자처하면서 이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야기를 할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은 기승전결이라는 어떤 줄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 물론 연대적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역사적 사실 보다는 각 시기별로 피에르 신부가 삶 속에서 행했던 사랑의 행위에 대해서 함께 공감해 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더 의미가 있을 듯 하다. 하여 그의 자서전에서 가슴에 공명을 일으키는 문구 위주로 내 생각을 풀어가며 이 책의 리뷰를 적을까 한다.

 

"타인은 지옥이라고 사르트르는 썼다. 나는 마음 속으로 그 반대라고 확신한다. 타인들과 단절된 자기자신이야말로 지옥이다."

 

사르트르는 자기(에고)라는 것을 하나의 허상으로 보았다. 예를 들어 한 인간의 감정은 타인들의 행위에 지배를 받는 것으로 보았다. 어떤 행동을 했는데 타인들이 인정을 하고 칭찬을 하면 나라고 생각하는 존재의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듯이 한 존재의 행복은 타인들이 가지고 있는데, 이런 연유로 타인은 지옥이라고 사르트르는 말했다. 사르트르 자신은 그래서 다른 사람의 시선에 무심하려고 무던 애를 썼다. 하지만 무관심하려고 애를 쓰는 것 조차 하나의 관심임을 깨닫고 스스로 찾고자 했던 바람직한 인간관계의 답을 결국은 찾지 못했다.

 

사르트르는 일단 존재 자체를 생각과 관념의 에고로 보았는데, 이것이 그가 범한 첫번째 오류다. 우리의 존재는 생각과 관념의 에고 너머에 있다. 그러하므로 진정한 나의 존재는 단지 있을 뿐, 생각이나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또한 애당초 나와 남의 구별조차 없다. 이것이 영적통찰을 통한 존재의 재발견이고 진실이다. 이런 진실을 사르트르는 거부했다. 스스로 분리와 개체화를 인정하고 말았다. 진실과 다른 가정을 진실이라 상정하고 그 안에서 해답을 찾으러 했기에 그의 사상은 치열했을지는 모르나 한편 공허한 메아리였을 것이다. 영적통찰이 빠진 실존은 그래서 허무하다.

 

남이 나와 단절될 때, 각자는 생각과 관념의 틀로 만난다. 자기 안의 생각들도 시간이나 사건에 따라서 바뀔 수 있기에, 그 유한성으로 인해 인간들은 스스로 불안하고 두려워한다. 또한 틀과 틀이 부딪히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갈등이 생긴다. 나의 틀을 나라고 생각함과 동시에 나의 틀이 진실이라고 믿으려는 성질이 있다. 서로가 자기가 믿는 신념이 진실이라고 우길 때, 타인과의 만남은 고통이 될 수 밖에 없다. 무엇보다 더 나아가 타인과 나를 분리시키고 단절시킨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신과의 분리를 전제로 하고 있다. 인간은 스스로 신을 대상화함으로써 신을 배신했으며, 그로 인해 벌을 받을 것이라는 두려움과 죄의식에 떨고 있다. 나와 남이 틀을 넘어 사랑으로 만날 때 이 모든 것은 초월된다.

 

"엠마우스 공동체의 세 가지 규칙, 1) 우리가 먹을 것은 우리가 노동해서 번다. 2) 우리는 모든 것을 나눠 가진다. 3) 베푸는 사람이 되는 사치를 누리기 위해 사는데 충분한 정도 이상의 노동을 한다."

 

먹을 것을 노동을 통해서 번다. 한 때는 이런 것을 전근대적인 경제활동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스코트 니어링/헬렌 니어링' '조화로운 삶' 이라는 책을 보고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스스로 자급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은 불안하다. 과연 생산성과 경제성만이 행복하고 풍족한 삶의 전부일까? 라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 지구는 그 안에 속한 인류를 먹여 살리기에 충분한 자원과 에너지, 그리고 작물들이 있다. 하지만 과잉생산과 낭비, 독점, 사치와 같은 인간의 욕심들이 이러한 조화로움을 망쳐놓았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후손들이 사용해야 할 것 까지도 다 뽑아쓰고 있다. 절약과 함께 나눠씀이라는 생태학적 관점은 고려되지 않고, 내가 힘이 있으니 마음껏 쓰고, 마음대로 버린다는 생각이 대부분이다. 북미대륙에서 유럽인들이 단지 가죽을 얻기 위해 그 수많은 버팔로들을 도륙해서 대륙 전체가 고기 썩는 냄새로 진동하던 광경을 인디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런 방식의 서구문명화가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하고 있다.

 

내가 노동을 통해 나의 먹거리를 재배할 수 있다는 것은 일면 원시적인 듯 하지만 여러 잇점이 있다. 일단 스스로 먹여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통해 삶이 안정된다. 또한 공기, 햇살, 바람, 대지의 은혜로움과 자연과 인간의 조화라는 철학을 몸으로 깨닫는다. 절기에 따라 농사를 지음으로써 순응과 받아들임을 배울 수 있고, 인간의 자만심을 내려놓고 더 큰 섭리가 있음을 이해한다. 자고로 옛부터 농사를 오래 지어온 농부들은 생활 철학자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함께 지구가 우리에게 베푸는 은혜로움을 골고루 만끽할 수 있다. 햇살이 사람을 가리지 않고 비추듯이 말이다. 이런 삶은 부의 과도한 집중과 그로 인한 폐해도 막을 수 있다. '러스킨' '나중에 온 사람에게도' 라는 책에서, 만일 마을에 부자가 있어도 마을 사람들이 모두 다 스스로 노동을 해서 자급할 수 있다면 스스로 나서서 부자의 집에 들어가 노동을 할 이유도 없고, 결국 부자도 하인들을 부릴 수 없어 직접 농사를 지을 수 밖에 없어, 부의 독과점의 폐해를 줄일 수 있다고 했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다 과거로 돌아가 농사를 짓자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분명히 직접 먹을 거리를 재배해 봄으로써 현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정신적 황폐함에 대한 정신적 치유를 얻을 수 있기에, 작은 텃밭이라도 가꾸면서 자연과 먹거리, 그리고 생태와 조화에 대해서 깨닫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좋을 것이라 본다. 인도의 간디가 왜 자급자족을 강조하며 스스로 물레를 돌렸는가? 그 행위를 통한 정신적 자립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엠마우스 공동체도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은 듯 하다. 무엇보다 사회의 부적응자, 부랑자라고 하는 이들이 스스로 생산한 것으로 남을 도움으로써, 각자의 존재가치를 한껏 드높여 삶을 긍정적이고, 희망적으로 볼 수 있다는 측면은 고무적이다. 인간은 다른 존재를 도움으로써 말로 다 할 수 없는 참 기쁨을 느낀다. 그 기쁨은 하나의 샘물이며, 나를 더 생명력 있게 가꾼다. 사랑은 스스로의 사랑을 통해 더욱 더 커진다. 신이 우리에게 자신을 배반할 수 있음을 알고도 자유의지를 준 것은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 사랑을 더욱 더 키우기 위해서다. 공동체의 부랑자들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살아갈 방편 이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 일 것이다.

 

"곤경에 처했다는 의식이 있을 때에만 우리는 구원받을 수 있다."

시련과 고난이라 불리는 장벽을 만날 때, 우리는 겸손해진다. 이제 뭔가를 들을 준비가 된 것이다. 젊을 때의 손쉬운 성공은 인생을 망치는 지름길이라 했다. 오만하고 방자하며 자신의 성공에 대한 신념으로 남의 이야기, 더 나아가 신적 소명을 외면한다. 이게 평생 그 사람의 틀이 되는 순간, 이 사람에게 성공은 하나의 큰 걸림돌일 뿐이다. 하고자 하는 바가 모든 것에 막혀 버릴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내 삶을 뒤돌아보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내 뜻대로 다 되는 세상은 원래 없음을 알게 되고, 그렇다면 내 뜻이 아닌, 더 큰 뜻은 뭘까에 귀 기울이게 된다. 들을 준비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의 구원은 시작된다. 결국 나를 내려놓고 온전한 합일, 사랑 가득 하나임을 경험할 기본이 이제야 갖춰진 것이다.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고 죽어야만 한다고 제자들에게 직접 설명을 했음에도, 베드로가 그럴 리가 없다고 하자. 예수가 사탄아 물러가라. 하나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뜻을 하나님 뜻이라 우긴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 뜻이 서로 배치되는 웃지 못할 일이 일어난다. 우리는 너무 자주, 또한 너무 쉽게 '하나님'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가? 무엇보다 자기의 욕심이나 사심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 이름을 거론하는 것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결국 하나의 신의 이름으로 입에 담지도 못할 전쟁들이 일어나고는 한다. 반성하고 또 반성해야 한다.

 

"삶은 누군가에게는 부조리고, 누군가에게는 신비다."

삶은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니라 경험해야 할 신비다. 이는 나를 영적인 세계로 이끈 스승님이 즐겨 쓰신 말씀이었다. 우리는 기적을 바란다. 예수께도 기적을 기대했다. 하지만 예수의 말씀 자체가 나는 기적이라고 본다. 물 위를 걸었다느니, 육적 부활을 했다느니, 죽은 이를 살렸다느니 그런 것들에 열광하고 집착한다. 왜 그런 것들에 그토록 집착하는가? 그 보다 수억 배나 더한 가치가 있는 말씀들에 왜 감동받지 못하는가? 삶에 마술을 기대하는 의식, 그 의식은 아직 샤머니즘적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반증은 아닐까? 삶 또한 그렇다. 삶에 기적을 바라는가? 삶에 마술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잘 살펴보면 삶 자체가 기적이고 신비다. 단지 내 눈이 멀고, 내 귀가 들리지 않아 못 알아차릴 뿐이다.

 

"우리는 왜 이 땅에 태어나는 걸까? 그것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함일 것이다."

참 아름다운 문구다. 왜 사는가? 돈 벌려고? 돈 벌어서 뭐하게? 우리의 삶이라는 것, 매일 매일 관계의 연속. 사람을 만나고 일을 만나고, 그 안에서 많은 감정들을 경험하고, 또 그렇게 성장하고 또 때로는 퇴행하며. 그 안에서 나를 발견해 간다. 관계의 연속인 삶에서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고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그저 아무 생각없이 바쁘기만 하다면, 그것은 다람쥐 쳇바퀴와 뭐가 다를 것이 있을까?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왜 주었나? 그 자유의지로 인간은 신을 배척하고 거부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의지를 준 것은, 능동적으로 사랑하라는 뜻이 아닐까? 자유가 없이 어떻게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까? 자유의지로 인한 온갖 폐해에도 불구하고 사랑 한 몸짓의 에너지가 그 모든 것을 다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사랑은 또한 사랑함으로써 더 커지는 속성이 있다. 사랑 그 자체인 신이 바라는 것도 결국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줌으로써 사랑을 더 풍성히 가꾸기 위함이 아닐까? 대신 우리의 마음 깊숙이 신을 동경하고 그리워하는, 달리 말하면 사랑하고 사랑 받을 때 기쁨이 샘솟도록 어떤 씨앗 하나(신성의 빛)를 주신 듯 하다. 그것을 잘 알아차리고 그 섭리대로 향할 때, 우리는 기쁨이 넘친다. 신바람이 난다. 물론 에고의 강한 장막으로 그 빛을 가리며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를 자기 멋대로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런 삶에서는 결코 참다운 기쁨을 발견할 수 없다.

 

"나는 있는 자, 그로다"

'I AM' 나는 아브라함 이전 부터 있는 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그 어느 때도 아닌, 지금! 그 어느 곳도 아닌 여기에 있는 자, 태어난 적도 없고 따라서 죽을 수도 없는 그런 나! 그 나를 깨달은 이는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 있는 자! 말미암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깨치지 못하리. 그 나는 빛이요, 생명이요, 부활이다. 예수가 아브라함 이전 부터 있다고 했을 때, 바리새인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의 말을 개미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 처럼. 하여, 성경의 말씀, 그 안에 들어 있는 여러 메타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의식을 드 높여야 할 터. 그런 과정 없이 성경 말씀을 곧이 곧대로만 듣는 다면, 때로 그것은 너무 맹목적이고, 때로 그것은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나는 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

있다고 믿는 것은, 억지, 맹목일 수 있다. 이해로 깨치면 저절로 샘솟는 믿음이 생긴다. 이해로 깨친 이는 믿음을 초월한다. 이해로 만날 때, 믿음은 사실과 진실이 된다. 그런 경지로 가야하지 않을까?

 

"마태복음(5, 복이 있는 사람)"

이 중 피에르 신부는 '마음이 가난한 자' '의로움 때문에 박해 받는 자' 의 경우는 바로 복을 받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미래에 복을 받는다고 나와있음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럼 먼저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 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는 마음이 비어있다는 뜻이다. 마음이 빈다는 것은 나를 내려놓는다는 것이며, 전적으로 신의 섭리에 자기를 맡긴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럴 때 영적으로 충만해진다. 이는 즉시에 바로 이뤄진다. 사실 우리는 빛의 속성, 신적 속성, 사랑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마음이라는 검은 천으로 그것을 가리고 있을 뿐이다. 그 검은 천을 걷어 버리면 원래 있어온 참나를 발견하는 것이다.

 

'의로움' 이라는 것은 또 무엇인가? 그것은 하늘의 질서를 따른다는 것이다. 나를 내려놓고 온전히 내맡기며 그 알아차린 바 대로 산다는 것이다. 인간이 자유의지로 선택한다면 바로 이 의로움을 알아차리고 선택해야 하며, 그 알아차린 바대로 삶을 살아야 한다. 예수는 '아버지의 일' 을 하러 왔다고 표현을 했다. 하늘의 천명을 알고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절대로 두렵거나 의기소침하지 않다. 그는 자기를 버림으로써 하늘과 하나가 되었다. 속된 말로 하나님 백을 등에 엎고 행동하는 것이니 거침이 없다. 그는 세속적인 죽음마저 초월한다. 그야 말로 진정한 도의 사람이다.

 

"동물들도 사랑을 한다. 하지만 자유없이 사랑을 한다."

인간의 사랑은 자유를 기반으로 한 사랑이다. 우리는 사랑하기 위해서 이 지구별에 왔다. 사랑은 억지로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자유와 자발성이 있어야 사랑을 할 수 있다. 신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준 것, 사랑을 거부할 선택을 할 수 있음에도 그 특권을 준 것은 바로 사랑의 힘을 믿기 때문이었다. 한 사랑의 힘은 수 백의 범죄(사랑 없음으로 인한 행위)를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의 에너지가 있다. 사랑은 서로 사랑을 주고 받으면서 에너지가 확장된다. 사랑 그 자체인 신은 우리가 자유의지로 서로 사랑하고 또 사랑 받기를 원하신다. 그럴 때 영적충만, 기쁨이 샘솟는다. 그것이 사랑의 속성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누구나 그런 신성을 가지고 있다. 동물의 자유없는 사랑은 본능일 뿐이다. 그 안에는 인간의 사랑이 가지는 거룩함을 찾을 수가 없다. 인간의 자유는 하지만 아무렇게나 사용하거나 내 변덕에 따라 사용하면 할수록 자유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특성을 지녔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끔찍한 죄책감으로 인해 옴짝달싹 못하게 주눅 들었던가?"

매질하는 모습으로서의 아버지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자기 생각으로 남들이 이미지화 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만난다. 그것이 진정 하나님을 만나는 것일까? 그 생각은 어디에서 왔는가? 생각으로 하나님을 만난다면, 모든 이들의 하나님이 다 다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일 뿐, 하나님 그 자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 생각을 진실이라 믿으며, 같은 종교인들끼리도 언쟁을 높인다. 하나의 코미디다.

 

도스도에프스키의 '카마라조프가의 형제들' 에서 2,000 년만에 다시 부활한 예수에게 대사제는 이야기한다. 신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었지만 인간들은 그 자유의지를 어떻게 사용할 지 모르고 있다. 그들은 자유의지로 인해 불안하다. 그래서 대사제는 그들에게 두려움과 죄책감을 심어주고 그것을 없애주는 역할을 대신 맡음으로써 종교를 부흥시켰노라 자랑한다. 자기들 성직자들은 비록 그것이 바람직한 것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불안과 죄책감에 뜨는 인간들에게 자기들을 통하면 그러한 죄를 사할 수 있다는 면죄부를 줌으로써 평화를 주었노라고 자랑한다.

 

분명 이 책의 저자인 피에르 신부도 교권화된 종교가 부흥을 위해, 과도하게 사람들에게 죄의식을 심어주었노라고 개탄한다. 인간은 하나님을 대상화 하고 있다. 인간의 개체의식 속에는 신과의 분리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스스로 대체화 함으로써 지혜를 얻었을 지는 모르나, 그로 인해서 신과의 분리, 그리고 그것으로 인한 죄책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 나를 온전히 내려놓고 완전한 합일을 이룰 때만 이러한 죄책감과 두려움은 없어진다. 그런데 기존의 교회들이 이런 인간 근원의 두려움을 오히려 부추겨 사적인 세력확장에 이용한 측면이 분명히 있다. 피에르 신부를 이를 직시한 것이다.

 

"네 복음서와 신약의 모든 글들은 그리스도에 의해서 씌어진 것도, 성령에 의해 석판에 씌어진 것도 아니다."

이 부분은 첨예하고 민감한 이슈다. 하지만 위의 글은 사실이다. 성경을 쓴 이가 예수의 의식이 아닌 이상, 그리고 온전히 자기를 내려놓지 않은 이상, 사사로운 사심이 들어갔을 수가 있다. 이것을 인정하느냐 아니냐? 이것을 인정하는 순간, 성경의 권위가 훼손된다는 측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이를 절대적 지주로 삼는 종교에는 하나의 큰 타격이 아닐 수 없다. 성경은 예수 사후에 그것도 예수의 사도들의 제자들 그룹에서 씌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예수가 살아계셨을 때, 12제자들은 예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의식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 하물며 그 후대의 제자들의 경우는 어떠하겠는가? 그러니 오직 이것만이 절대적 진리라고 이야기 할 수 있을지는 잘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이상으로 이 책에 대한 리뷰를 마친다. 나에게 공명을 일으킨 부분들에 대해서만 기술해 보았으니, 책의 내용에 관심이 있는 분들은 한 번 일독해 보기를 권한다.  

안광호 (khajoh@naver.com)

[주제어]: 단순한 기쁨, 피에르신부, 마음산책

 [리뷰어 소개]

안광호 박사는 포항공대 전자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삼성전자에서 5년 동안 통신용 반도체를 개발했습니다. 그중 5제품을 양산하여 국가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세계최초로 CDMA1 Chip Transceiver 를 개발한 경험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2006년부터, 지식경제부산하 국가연구소인 '전자부품연구원'에서 팀장으로 근무하며, 국가의 미래 먹거리 창출을 기획하고, 선도형 기술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잘산다는 것이 뭘까? 에 대한 순수한 탐구욕을 가지고 있으며과학의 바탕위에 인간의 심리와 의식세계를  통합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글로 풀어가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알아차림, 매일경제신문사], [소프트마인드, 비전과리더십], [마음세수, 예문당], [삼성붕괴시나리오, 다산북스], [열다섯 살 꿈의 시크릿, 미래지식], [긍정, 원앤원북스] 10여권이 있다.

 

산과 자연을 사랑하는 '자유여행가' 이기도 한 그는, 최근 '딸과의 백패킹 이야기' 를 고정적으로 잡지에 연재하고 있기도 하다.

 

집필 및 칼럼에 대한 문의 및 의뢰는 khajoh@naver.com, 홈페이지: www.akh.co.kr, 블로그: www.doctorahn.co.kr, 페이스북:www.facebook.com/kwanghoahn1, 트위터:www.twitter.com/kwanghoahn

 

[과학과의 통합을 위한 그의 독창적 행보]

l  6 Sigma Black Belt 획득

l  STRONG(직업흥미프로그램) 전문가 획득

l  한국심리학회 MBTI 전문가 획득

l  에니어그램 수련

l  Habiram Sprituality Training Course (영성심화수련)

l  위빠사나 명상 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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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자서전_함석헌_한길사_안광호_의식경영연구회_아힘사_사티아그라하

독서리뷰 2014.01.10 09:08

 

[간디 자서전, 한길사]

 

내가 간디의 자서전을 읽어야 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다석 유영모 선생의 강의를 들으면서 부터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다석 유영모 선생의 제자였던 박영호씨의 책들을 보면서 톨스토이와 간디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올라왔음을 고백한다. 간디의 전기는 수 없이 많지만 다석 유영모의 사상적 씨앗을 잉태하여 큰 나무로 우뚝 선 함석헌 선생이 번역한 간디의 자서전을 골랐다. 아주 어릴 적에 간디는 내게 정치적 지도자라는 '' 로써 다가왔다. 그를 떠 올리면 '물레, 비폭력, 무저항, 자치' 와 같은 단어들이 생각났다. 하지만 '' 은 언젠가는 깨어지라고 있는 것이다. 최근 들어 나는 간디를 '영성가' 라는 측면에서 다시 재조명하고 싶었는데 마음만 있었을 뿐 기회를 못 잡고 있었다. 그런 내개 기회의 단초를 제공한 사람이 바로 앞서 이야기한 '다석 유영모' 선생이다.

 

간디는 그의 자서전을 '진리실험' 의 기록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진리실험은 힌디어로 '사티아그라하' 라고 한다. 진리란 과연 무엇인가? 진리란 사실이다. 사실은 오직 하나다. 그래서 이는 절대의 세계다. 예수는 진리를 사랑이라 했고, 석가는 진리를 깨달음과 자비라고 했으며, 노자는 '' 라고 했다. 절대라는 것은 오직 하나다. 그래서 하나님이다. 상대세상에서 태어나 절대의 진리를 추구할 수 있다는데 인간의 위대함이 있다. 우리의 자유의지는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를 동물로 만들 수도 있는 반면 신으로 거듭나게도 한다. 인간은 짐승마음인 수성(獸性)과 신적마음인 신성(神性)을 다 가지고 있다. 거듭남과 타락은 우리 자유의지의 몫이다. 상대의 세계 속에서 절대의 경지로 오르는 것이 진정한 '부활' 이다. 육적부활이 기적이 아니라 의식의 부활이 진정 기적이다. 이를 두고 다석 유영모는 '제나, 몸나 죽어 얼나 솟나' 라고 표현했다. 그래서 간디의 '진리실험' 은 나를 죽이고 온전히 내맡기는 삶을 향한 한 인간의 여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결국 집 떠나온 아들이 다시 아버지를 찾아가는 한 편의 드라마인 것이다. 간디는 자서전을 따로 적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아니라 어릴 적 부터 지금까지의 자신의 '진리실험' 을 기록으로 남기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서전이 되었노라고 고백한다. '진리' 에 입각해 싸우는 사람은 처음부터 이기는 싸움을 하는 이다. 섭리가 그의 편에서 그를 도운다. 물론 개인이나 조직의 사사로운 마음을 '진리' 라고 속이고 사람들은 오늘도 싸우고 있지만 진정 나를 버리고 온전히 진리와 하나된 자는 처음부터 이긴 사람이다. 이런 이들은 전쟁을 하지 않고 이기기 위해 각을 세우지 않는다. 사랑과 평온과 자비의 마음으로 안아 줄 뿐이다. 하지만 그 안에 범접할 수 없는 큰 힘이 느껴진다. 뭔가를 취하려는 마음, 인정받으려는 마음, 오직 내 것만이 최고고 유일한 진리라는 마음은 사사로운 마음이다. 이는 진리를 가장한 거짓이다. 진정한 진리는 하나됨의 마음이다. 이 안에서 나와 남의 구별은 없어진다. 오직 하나인데 싸우고 말고 할 것이 뭐가 있는가? 있음 그 자체로 감사한 세상일 뿐이다.

 

이러한 간디의 진리실험은 여러 방면에서 시도되었다. '아힘사(비폭력과 무저항), 무소유, 채식과 단식, 브라마차리아(금욕주의)' 가 바로 그것들이다. 간디는 정치적 지도자로 알려져 있지만 한 편으로는 실천적 영성가로 분류되기도 한다. 진리추구가 바로 영성에의 갈구가 아니던가? 어느 영성가들과 다른 것은 세속의 삶과 깊은 관계를 맺고 그것을 범 세계적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테라와다 불교의 초기 씨앗이 간디를 통해서 진정한 '대승' 으로 승화한 느낌을 나는 받았다. 비록 그는 '바가바드기타' 를 사랑한 힌두교지만 그의 삶 속에서 특정한 종교의 색깔을 찾을 수는 없다. 이는 힌두라는 방편을 이용했을 뿐, 진리추구라는 순수열망을 삶에서 실천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예수가 그랬듯이 상대의 세계에 탐닉하는 사람에게는 성가신 존재로 비쳤나 보다. 결국 그는 같은 힌두교 신자에 의해서 암살을 당했다. 힌두교에 갇힌 자가 힌두교의 기반에서 진리추구를 통해 관용을 허용했다는 이유로 간디를 죽인 것이다. 유대교에 갇힌 율법학자나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인 것과 같다. 기독교를 만나는 것, 불교를 만나지만 갇히는 순간 진리에서 멀어진다. 우리는 자주 그런 편협을 경험한다.

 

그의 자서전을 통해 나는 막연하게 알고 있던 '비폭력과 무저항' 의 실체와 원형에 조금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었다. 그는 절대로 억울함에 대해 화를 내지 않았다. 그와 그 조국을 해치려는 무리 앞에서 분노하기 보다는 그들의 무지와 편협함을 불쌍히 여길 뿐이었다. 삶 속에서 이를 실천하기가 얼마나 어렵던가? 그는 예수가 말한 '원수를 자기를 사랑하듯이 사랑하라' 는 구절을 철저하게 삶 속에서 지켰을 뿐만 아니라 그가 먼저 '' 을 보임으로써 전 인도와 세계인들을 각성케 하였다. 이는 진정으로 큰 마음이다. 엄마의 마음처럼 큰 마음, 사랑 그 자체인 마음이 아닌가? 엄마는 아이가 화를 내도 다 받아주고 절대로 이기려 하지 않는다. 단지 어긋난 행동을 하는 아이를 바라보며 사랑의 눈물을 흘릴 뿐이다. 정말로 커기 때문에 져 줄 수 있는 것이다. 간디의 비폭력과 무저항은 형식이나 무엇을 바라기 위한 마음이 아니라 온전히 그대로 신적인 자애와 사랑의 마음 그 자체였다. 전 인류가 예수 한 사람을 떠 받들었듯이 간디의 이런 위대한 정신이 대영제국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엄마나 아빠가 아이에게 이기려고 대드는 순간 비난과 힐난의 대상이 될 뿐이다. 아버지와 엄마는 아이에게 져 줌으로써 더 위대해진다. 간디와 그를 본 받은 인도의 사상가들은 이런 큰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대영제국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불복종에 대한 어떠한 처벌도 항의없이 받아들였다.

 

그 당시 일본이 우리를 식민화 했듯이 영국도 인도를 식민화했다. 요즘 일본의 우경화를 우려 섞인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데, 피지배 국가들 중에 유독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들만 식민지배에 대한 반감이 높다는 것은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서는 일본의 편협함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간디는 지배자들의 부당함에 대해서는 진리에 입각해서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펼쳤지만 영국이 전쟁으로 곤란을 겪었을 때 (예를 들어 보어전쟁이나 세계 대전 당시), 전장으로 나가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하는 일을 자처했다. 그는 대영제국을 있는 그대로 인정했고, 그 구성원으로서 책임 있는 행동을 스스로 했다. 간디는 영국을 도와 주었지만 그것을 기회로 이용하지 않았다. 즉 영국을 도와주었기 때문에 영국이 인도인들을 동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조건들이 없었다. 조건이 있다는 것은 사사로운 마음이요, 상대의 세계다. 진리추구가 평생의 과업인 간디로서는 순수함의 원형 그대로 다가갔을 뿐이다. 물론 전쟁을 도운 것에 대한 비판도 있다. 그도 인정을 했다. 전장에서 그는 부상당한 군인들을 치료하는 자원봉사를 했다고는 하지만 전쟁이라는 불순한 목적을 도운 이상 자신도 죄인이라고 했다. 그는 진리의 애호자는 어둠속을 헤맬 때도 있음을 스스로 인정했다. 성경에 보면 '돌아온 탕아' 이야기가 있다. 탕아짓을 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탕아짓을 했더라도 느끼고 돌아오면 다 오히려 은혜인 것이다. 부처를 죽이려 했던 살인마 '앙굴리말라' 도 결국 그 죄의 뉘우침과 정진을 통해서 부처의 위치까지 오르지 않았던가? 이렇듯이 간디도 궁극적 목적이 진리를 탐구하는데 있기만 하면 그 사람의 계획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결말은 절대로 해로운 것이 아님을 알았다. 사람의 입장에서는 패배지만 진리를 추구한다면 분명 성장만이 있을 뿐이다. 온전히 내맡긴 자는 그래서 자신을 버림으로써 절대를 얻는다. 그는 절대를 얻었기 때문에 재판을 받거나 감옥에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재판을 받으려 가면 그 날은 '간디가 재판 받는 날' 이 아닌 진리의 심판에서 '정부가 재판 받는 날' 이었던 것이다. 그는 한 개인 안의 절대성을 알았기 때문에 어떤 한 개인이라도 업신여기면 안 된다고 하였다. 상대세상에서 개체의식과 분별의식에 길들여진 우리로서는 한 개인을 업신 여기는 것이 그 한 몸만을 해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간디와 같은 절대의 사람한테는 이는 온 세상을 해치는 일이 된다. 간디에게는 너와 나의 구별은 없고 오직 하나일 뿐이다.

 

그의 진리실험(사티아그라하) 은 변호사였던 간디의 초기 직업관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통상 변호사들은 진실과 상관없이 돈을 받은 의뢰인들의 승소를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윤리와 양심보다 의뢰인의 승리가 우선인 것이다. 간디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따라서 변론을 맡기 전에 의뢰인들에게 모든 진실을 다 말할 것을 주문했으며, 자신은 진리를 위해 봉사하지 거짓으로 승소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처음 그의 이런 태도는 조롱과 비난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진리의 힘은 굳이 드러내려 하지 않아도 진리 스스로 그 힘을 자연스럽게 드러내었다. 간디가 변호하는 모든 소송은 이길 가능성이 높다는 인식이 대중들과 법정에 각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종의 보증수표 효과를 낸 것이다. 그가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발견한 것은 변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법에 대한 지식이 아닌 '사실과 진실추구' 라는 것이다. 법의 3/4 이상이 사실에 입각하기 때문에 사실과 진실만 잘 헤아려도 변론은 저절로 된다는 것이다. 간디의 위대한 점은 이런 실천력이다. 이렇게 행동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당장 자기 밥줄을 쥐고 있는 고객들이 떠날 것 같은 두려움과 불안감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그는 돈, 명예, 권력과 같은 것들 보다는 '진리추구' 에 관심을 가지기로 맹세했고 또 그렇게 행동했다. 그는 세속의 평가와 실패를 초월했다. 궁극적 목적이 진리를 탐구하는데 있기만 하면 그 사람의 계획이 실패했다 하더라도 결말은 절대로 해로운 것이 아님을 알았다. 나는 그의 이런 진리에 대한 실천적 행동력을 본받고 싶음을 고백한다. 또 그 간극만큼 부끄러움을 느낀다. 내가 아닌 내 조직의 안위를 위해서 가끔씩은 어쩔 수 없다며 진실과 어긋난 말을 하기도 했음을 고백하며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진리추구란 또한 우리 모두가 하나임을 뼛속 가득히 느끼고 실천하는 것이다. 너와 내가 없이 모두 다 하나다. 따라서 그는 결코 한 개인이라도 업신 여기지 않았다. 한 개인의 업신여김은 그 한 몸 만을 해하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온 세계를 해하는 것임을 안 것이다. 인디언들의 말로 '마타쿠예오야신' 이다. 부처는 깨달은 자는 자비와 사랑이 충만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깨달은 자는 분별과 상대의식이 없이 내가 곧 남이기 때문에 남의 아픔이 곧 나의 아픔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간디도 그러했다. 인도에는 카스트제도가 있고 그 최하위에 '불가촉천민' 들이 있다. 어떻게 보면 동물보다 더 못한 업신여김을 받는 계층이라 할 수 있겠다. 간디는 힌두교를 믿는 인도사람들이 그 종교의 본질을 왜곡하고 나와 남을 철저하게 구별하는 이런 신분제도를 유지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뜻있고 깨어있는 사람들 끼리 모였다는 공동체 내에서도 '불가촉천민' 의 입회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았지만 그는 진리에 입각해 그들을 차별 없이 받아들였다. 간디는 신분이나 종교, 부와 명예를 초월해 진리에 입각해 행동한 것이다. 이는 어마어마한 혁명이다. 심지어 이런 간디의 행동을 두고 사회와 조직을 위태롭게 한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예수도 유대의 율법을 무시하여 정치인, 율법학자, 바리새인들의 미움을 사지 않았는가? 예수에게는 인간이 만든 조직화된 종교와 율법보다 진리추구가 우선이었다. 간디는 또한 스스로 3등객실을 타는 것을 자처했다. 그 당시 3등객실의 손님들은 개나 돼지와 같은 취급을 당했다. 그는 스스로 3등 객실을 이용함으로써 이런 불합리성과 불평등이 개선되기를 강력하게 희망했다. 그는 이를 위해 기꺼이 수모를 감내했다. 몇 시간을 콩나무 시루 같은 객차에서 아픈 몸을 이끌고 서 있기도 했고, 역무원들에게 짐승과 같은 대우를 받는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느낀 점들을 관리들이나 정치인들에게 보고했고 개선되기를 희망했다. 물론 손님들 스스로도 자신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해야 할 실천목록들을 알려주었다.

 

그의 비폭력과 무저항은 힘이 없는 한 인간이나 조직들의 나약한 몸부림과 몸짓이 결코 아니다. 진정 내면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비폭력과 무저항이 가능한 것이다. 분노하고 싸우는 것은 같은 레벨들 끼리 하는 행동이다. 압도적인 우위에 있다면 오히려 한 번 웃거나 달랠 뿐이다. 봄이 와서 꽃이 피는 것이 아니라 꽃이 핀 때가 봄이듯이 간디는 스스로 비폭력과 무저항을 실천함으로써 정신적으로 위대해 졌는지도 모르겠다. 영국이나 인도의 정치인들을 혼냈지만 소리 없는 침묵과 비폭력으로 항거했을 뿐이다. 간디가 원래 위대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그런 선택을 하다보니 더 위대해지지 않았을까? 그는 때로는 '비폭력과 무저항의 저항' 을 위해 파업을 하기도 했지만 민중들에게 네가지의 비폭력 행동강령을 주문했다. '첫째, 결코 폭력을 사용하지 말 것, 둘째, 결코 파업 방해자들을 괴롭히지 말 것, 셋째, 결코 동정금에 의존하지 말 것, 넷째 파업이 아무리 오래 계속되더라도 결코 흔들리지 말고, 파업하는 동안 정직한 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할 것' 이 바로 그것이다. 돈이나 수입 때문에 진실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그는 삶을 간소하게 하며, 스스로 자급자족 할 수 있는 별도의 노동을 통해 파업중 이라도 생계를 유지할 것을 강하게 주문했다. 무엇보다 생계라는 민생고에 직면하는 순간 진실마저 던져버리는 사례를 너무나도 많이 봐 왔기 때문이다.

 

그는 아주 간소한 삶을 살았다. 그가 남긴 유품이라고 해 봐야 안경, 신발, 수첩 등이 전부다. 하지만 그가 원래부터 무소유의 삶을 산 것은 아니다. 초기 영국유학 시절 소위 말해서 폼을 잡던 시절이 있었다. 그는 그 당시 돈의 수입과 지출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좋은 버릇을 가지고 있었는데, 하숙을 하면서 한 달에 한 두번씩 하숙집의 주인 식구들을 위해서 자기가 지불하는 외식비용과 집과 학교를 오가는 교통비용이 상당함을 발견했다. 그는 생활비를 절반 이하로 줄이기로 마음먹고 학교 주변에서 자취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 경험을 통해서 자신의 삶을 단순하게 하여 지출을 줄이면 줄일수록 삶이 더 풍요로워 진다는 것을 체득했다. 그는 이런 무소유의 삶을 진리추구의 한 축으로 끌어들였다. 결국 그는 영국 유학 초기 생활비를 5배 이상 줄이는데 까지 성공했다. 톨스토이는 '필요한 게 없는 사람일수록 풍요한 삶을 누린다' 고 했다. 나 또한 깊이 반성하고 공감하는 바다. 이 안에 현대인들의 아이러니와 어리석음이 내재하고 있다. 우리는 물질의 획득과 그것의 유지를 위해 우리의 영혼을 너무 많이 고갈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자동차의 소유를 예로 들어볼까? 2천만원 정도의 자동차를 소유하는 순간, 기름값, 세금, 감가상각등을 고려하면 1년에 천 만원 이상이 지출된다. 즉 자동차 하나를 타기 위해 우리는 천 만원 이상을 더 벌어야 하고, 그 만큼 더 일을 해야 한다. 물론 편리는 하지만 반드시 있어야 할 물건은 아니다. 나도 알고 당신도 알고 누구나 이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실천이 어려운 것이다. 월 백만원, 하루에 삼만원 이상을 자동차에 쓰고 있는 것이다. 큰 집을 소유함으로써 버리는 돈도 무척 많다. 세금이나 유지비, 그리고 집값이 오르지 않을 경우의 감가상각을 생각하면 1년에 천만원, 2천만원 정도는 그냥 지출된다. 집과 자동차를 소유하는 순간 1년에 최소 2천만원을 더 벌어야 한다.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남과 나를 비교하며 상대적인 우월감이나 빈곤감에 내몰린다.

 

간디는 진정 구원을 원한다면 관리인 처럼 살아라고 했다. 이 세상에 소유는 없고 단지 인연 따라 맺는 관계 밖에 없다. 내 것이라고 강하게 믿고 있는 내 몸도 사실은 내 것이 아니라 이 지구별에서 살기위해 잠시 빌린 '지구복' 일 뿐이다. 그러니 다른 내 것들은 말해서 무엇 하겠는가? 하지만 이것이 쉽지가 않다. 탐 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하면 그것을 꼭 가지고 싶어하고, 가지지 못하는 자신의 상태를 책망하며 고통과 불행에 빠진다. 가끔씩 헬렌니어링의 '조화로운 삶' 에 묘사된 청빈의 삶에 대해 생각해본다. 도시문명을 떠나 미국의 버몬트 주의 산골로 들어간 그들 부부는 1년에 6개월만 일하고, 나머지 기간 동안은 여행이나 글쓰기 등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것, 하루의 일상도 절반만 일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신들이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할 것이라고 규칙을 세우고 자급자족의 삶을 영위했다. 자연에서 난 것들을 감사하게 먹으며, 스스로 집을 지으며, 산에서 체취한 단풍나무에서 시럽을 만들어 팔아 꼭 필요한 것만 샀다. 그들은 욕심을 버림으로써 모든 것을 다 가지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최근 들어 텃밭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은퇴 후의 삶에서 자급자족에의 가능성을 보기 위한 측면도 있음을 고백해야 겠다. 여하튼 무소유는 무집착 이다. 어느 것에도 걸림이 없이 단지 소유를 인연에 따른 관계로 이해될 때, 마음 깊숙한 곳에서 풍요와 감사가 올라온다. 그는 공공의 사업을 할 때도 '영구기금' 을 거부하고 필요할 때 마다 민중의 돈을 받아서 사용했다. 영구기금을 사용하면 공공사업을 하기에 편리한 점은 있으나 이 돈이 누구로 부터 나오는지에 대해 망각하고 함부로 돈을 쓰게 된다는 이유 때문에 철저히 영구기금을 거부했다.

 

간디의 진리실험은 채식과 단식에 대한 고집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내가 고집이라고 표현한 것에 주목하기 바란다. 그는 채식을 생활화 했는데 현대의학에서는 우유와 같은 최소한의 동물식은 인간의 몸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밝혀져 있다. 간디도 그것을 알지만 자기의 목숨보다 원칙이 더 중요했기에 자기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의사들은 그런 간디를 두고 최소한의 우유라도 먹으면 살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목숨을 담보할 수 없다면 고개를 절래 흔들기도 했다. 간디의 채식에 대한 고집은 그의 힌두 종교의 배경에 기인한 것인데, 내가 볼 때는 진리와는 무관한 하나의 틀로 보였다. 그래서 나는 앞에서 언급한 '고집' 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다. 단식은 무소유와 절제의 삶을 되새기는 하나의 의식처럼 보였다. 하지만 단식은 절제의 무기가 될 수도 있지만, 탐닉의 강한 무기도 될 수 있다. 원래 금욕과 쾌락은 종이 한 장 차이지 않은가? 진자의 추가 왼쪽의 정점에 다다들 때, 가장 빠르고 쉽게 오른쪽의 끝을 향하는 법이다. 간디도 이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마음 속에서 마저 이러한 탐닉이 올라오지 않는 경지까지 자기를 훈련시켰다.

 

이쯤에서 나는 그의 금욕주의 (브라마차리아) 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가장 큰 욕구인 식욕에 이어 성욕마저 그는 버리고자 했다. 37세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는 아내의 양해를 구해 더 이상의 성관계를 가지지 않기로 합의를 보았다. 우리 나라에서는 다석 유영모 선생이 간디의 절차를 따라 '육적 해혼' 을 단행했다. 그는 겉으로 감각을 끊어버리는 것으로는 감각의 대상만 사라질 뿐 동경하는 마음은 뒤에 남기 때문에 진리에 대한 발심으로 그 동경마저 사라지게 했다. 결국 금욕이나 쾌락에도 치우침이 없는 고요한 평정에 도달하려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씩 올라오는 욕정에 대해 자신의 불완전함을 고백하는 대목도 자서전의 곳곳에 보인다. 그는 금욕주의를 실현하면서 자주 '바가바드기타' 의 다음 구절을 음미했다. '감각의 대상을 골똘히 생각하면 집착이 생긴다. 집착에서 욕망이 일어나고 욕망은 불타올라 맹렬한 정욕이 되고 정욕은 무분별을 낳는다. 그러면 기억이 온통 틀려져 고상한 목적이 사라지고 마음은 말라버려 목적과 마음과 사람이 모두 망한다' 그가 브라마차리아를 그만 두겠다고 결심한 것도 이런 정욕으로 인하여 고상한 목적과 마음이 말라버려 스스로 망가뜨려지는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는 감각의 대상, 욕정의 대상에 대한 생각과 집착에서 자유롭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감각의 대상을 먼저 끊었으며 더 하여 집착하는 마음마저 버리기 위한 삶 속 수련을 병행했다.

 

간디는 진리를 동경하는 사람은 결혼을 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절대의 세계, 에덴동산, 아버지의 품에서 이 상대의 현상계에 떨어진 이유가 분명히 있다. 결국 우리는 이 현상계의 경험을 통해서 거듭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에게 인연처럼 다가온 것들에 대해 배척하기 보다는 온 힘과 정성으로 경험해야 한다고 본다. 그럴 때 올라오는 영적인 불편함들을 잘 알아차리는 속에 은혜받음이 분명히 있다. 시련과 고통이라 사람들이 부르는 그것을 잘 겪고 났을 때 우리가 더 크게 성장하는 것 처럼, 다 이유가 있어 이곳 상대의 세상에 온 것이 아니겠는가? 산 속에 들어가 홀로 은연자중 하며 지내는 것 만큼, 이 세상 속에서 부딪히는 여러 관계를 통해서 나의 틀과 에고들을 발견하고 내려놓고 더 큰 의식으로 거듭나는 삶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나는 본다. 삶은 우리를 성장시키는 아주 좋은 무대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간디와 생각을 달리함을 밝히고 싶다.

 

이제 정리를 하면서 몇 가지 인상 깊었던 구절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자 한다. 먼저 그는 매주 월요일 마다 침묵의 시간을 가졌다. 이는 아주 좋은 습관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인들은 너무나 정신이 소란스럽고 쓸데 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한다. 자신의 어떤 말을 어떤 생각을 가지고 하는지 알아차리는 힘도 약하고, 홀로 자신의 내면과 대화를 하는 경우도 거의 없다. 또한 대화도 아주 일방적이다. 대화의 시작은 경청인데 잘 듣지도 않고 마구 내뱉는다. 이는 하나의 역겨운 말의 구토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현대인들에게 홀로 침묵 속에 잠기는 시간은 아주 유용하다. 나는 주말 아침이면 와이프와 근처의 야트막한 산을 산책한다. 두 시간 정도 걸으면서 일주일 동안 서로의 일과 가족들의 공통관심사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아주 값지다. 그런데 간디의 자서전을 잃고 아무 말 없이 손을 잡고 산책길을 걸어보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말은 안 했지만 서로 더 잘 통하고 관계도 풍성해지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서로 말 없이 거저 바라만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또한 간디가 최초로 도둑질을 하고 불편했던 자신의 마음을 잘 알아차려 평소 엄하기로 소문난 아버지한테 자백서를 바친 내용은 아주 감동적이었다. 간디는 두려움과 불안감을 극복하고 아버지 한테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서를 바쳤다. 엄청난 꾸중과 매질을 당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아버지는 말 없이 눈물을 흘리셨다. 어린 간디는 아버지께 '자신의 죄 때문에 아버지가 스스로를 벌하지는 말아달라' 는 부탁을 고백서의 말미에 적었다. 이 부분이 아주 감동으로 내게 다가왔다. 간디의 씨앗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두렵고 죄송하고 불안했음에도 그는 대가를 치르겠다고 마음 먹었으며 그 순간 죄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여기에 더하여 그는 자신의 안위 보다는 아버지가 스스로를 책망하지 않았으면 하는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누구나 죄를 저지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죄를 통해서 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으며 아버지와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진리' 체험을 한 것이다. 아마도 그의 이런 경험이 훗날 가슴 깊은 사랑에서 우러 나오는 비폭력, 무저항의 간디 사상의 씨앗으로 작용했을 법 하다. 그는 아버지가 보여준 사랑의 구슬 방울들로 인해 영혼이 정화 되었으며 그 순간 죄의식이 사라졌노라고 고백을 했다. 사랑의 화살을 맞은 자만이 그 힘을 안다. 간디는 '아힘사' 의 위력을 그때 제대로 경험을 했다. 이 아힘사의 힘은 그에게 닿는 모든 것을 변화시키며, 한계가 없다.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순결한 고백은 그것을 '받을 권리가 있는 사람' 앞에 바쳐졌을 때 가장 순수한 형태의 회개가 되는 법이다. 그도 순결했고 그의 아버지도 그 순결한 고백을 충분히 받을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잘 하지 못하더라도 자기의 일을 하고자 했다. 의무를 다하다 죽는 것은 나쁠 것이 없으나 남의 길을 찾는 자는 항상 헤맨다는 '바가바드기타' 의 구절 처럼 자신에게 주어진 섭리의 일을 잘 헤아려 멋지게 그것을 이룩해갔다. 비폭력과 무저항의 실천력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그의 이런 영향력은 아직까지 우리 인류의 정신과 의식 속에 살아있다. 그는 자신의 아힘사의 정신을 인도인들의 마음 속에 깊이 심어주었다. 실로 한 인간의 힘은 위대하다. 우리는 비록 한 인간이지만 결국 하나로 이어져 있는 신적 존재이므로 진리에 입각한 우리의 정신은 무한의 에너지를 가지고 우리를 하나로 옭맨다. 그의 자서전을 통해 나를 뒤돌아 본다. 여전히 탐심이 많지는 않은지? 나는 과연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그런 삶을 살고 있는지 뒤돌아보는 하루다.

 

광호 (khajoh@naver.com)

[주제어]:간디, 아힘사, 타고르, 브라마차리아

 [리뷰어 소개]

안광호 박사는 포항공대 전자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삼성전자에서 5년 동안 통신용 반도체를 개발했습니다. 그중 5제품을 양산하여 국가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세계최초로 CDMA1 Chip Transceiver 를 개발한 경험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2006년부터, 지식경제부산하 국가연구소인 '전자부품연구원'에서 팀장으로 근무하며, 국가의 미래 먹거리 창출을 기획하고, 선도형 기술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잘산다는 것이 뭘까? 에 대한 순수한 탐구욕을 가지고 있으며과학의 바탕위에 인간의 심리와 의식세계를  통합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글로 풀어가고 있습니다.

 

저서로는 [알아차림, 매일경제신문사], [소프트마인드, 비전과리더십], [마음세수, 예문당], [삼성붕괴시나리오, 다산북스], [열다섯 살 꿈의 시크릿, 미래지식], [긍정, 원앤원북스], [나를 행복으로 이끄는 도전, 에이원북스], [6 시그마로 부자아빠 되기, 네모북스], [행복한 사과나무 이야기, 아름다운사회] 가 있으며, [꿈과 성공이 있는 명품인생] 이라는 오디오북을 발간하였습니다. 2007년 헤럴드 경제가 주최하는 한국의 아름다운 사람’ 20인에 선정된 바 있습니다.

집필 및 칼럼에 대한 문의 및 의뢰는 khajoh@naver.com, 홈페이지: www.akh.co.kr, 블로그: www.doctorahn.co.kr, 페이스북:www.facebook.com/kwanghoahn1, 트위터:www.twitter.com/kwanghoahn

 

[과학과의 통합을 위한 그의 독창적 행보]

l  6 Sigma Black Belt 획득

l  STRONG(직업흥미프로그램) 전문가 획득

l  한국심리학회 MBTI 전문가 획득

l  에니어그램 수련

l  Habiram Sprituality Training Course (영성심화수련)

l  위빠사나 명상 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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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_헬렌 니어링_스코트 니어링_안광호_의식경영연구회_조화로운삶

독서리뷰 2013.06.04 02:00

 

[아름다운 , 사랑 그리고 마무리, 헬렌니어링]

 

'무엇이 과연 행복인가?'

'무엇이 진정한 성공인가?'

'무엇이 진정으로 잘 사는 것인가?'

 

우리는 늘 물음과 함께 해야 한다. 물음은 언제나 우리에게 가장 합당한 길을 안내해 주는 길잡이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물음을 잊어버렸다. 그래서 바쁘기만 하다. 바쁘기는 한데 아무 생각도 없고 허전하다. 이는 영혼이 말라버린 기계의 삶과 유사하다. 나는 과학도다. 특히나 변화의 속도가 가장 빠른 정보통신쪽의 연구를 하고 있다. 비록 연구를 하고는 있지만, 철학이 빠진 그리고 물음이 빠진 발전과 연구에 대한 아쉬움은 언제나 크다. 우리들은 헛똑똑이 인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위한 발전이며, 누구를 위한 개발인가?

 

우리는 자가용을 소유하고, 멋스런 옷과 집을 가지고, 손에는 스마트폰이라는 아주 신기한 기기를 들고 다닌다. 그런데 그 만큼 더 행복한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소위 스마트폰에 중독이 되어 있는 것 같다. 거리를 걸어가면서도 스마트폰을 쳐다보며 걷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하다. TV라는 바보상자에 통신기능이 들어간 소형기기를 하루 종일 끼고 산다. 이게 중독이 아니고 무엇인가? 사람들은 책을 점점 더 읽지 않는다. 스마트폰의 가십거리를 읽거나 책을 읽더라도 그 안에 있는 정보와 돈벌이와 관계된 공부를 하기 위해 글을 읽을 뿐이다. 이뿐인가? 사람들은 자기 글을 쓸 줄 모른다. 140자 이상의 문장을 적을 기회가 없다. 자기의 삶에 대한 에세이를 적는 것에 어려움을 겪는 젊은이들이 많다고 한다.

 

세상 참 많이 편해졌다. 마음만 먹으면 하루 사이에 대한민국 구석 구석 다 가 볼 수 있다. 통신의 궁극은 직접 대면하는 것과 같은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편리한 세상에 살고 있는데 가장 가까운 가족이나 친지들과의 관계성은 예전보다 더 소원하다. 끈끈한 '' 이랄까? 그런 인간적인 터치감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다. 관계의 숫자는 분명 많아졌을 지 모르나, 질은 예전만 못하다. 자칫 허수 뿐인 온라인 상의 관계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물어 볼 필요가 있다.

 

오늘 소개할 책은 이런 우리들의 삶에 한 번쯤 의문을 갖게 하는 책이다. 의문은 물음의 시작이며, 이런 호기심들이 우리를 합당한 길로 이끌 수도 있다. '스코트 니어링과 헬렌 니어링' 이라는 부부가 지은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가 오늘 소개할 책이다. 이들은 '조화로운 삶' 이라는 책을 통해 과연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에 대해 경종을 울린 바가 있다. 오늘 소개할 책은 부인인 '헬렌 니어링' 이 남편인 스코트를 떠나보내고 난 뒤 자신의 삶, 그리고 스코트와의 관계를 추억하며 적은 글이다. '조화로운 삶' 보다는 훨씬 뒤에 기술된 글이기도 하고, 여성 특유의 감성으로 적은 글이라 가슴 한편이 따뜻해지는 책이다.

 

이들은 '소로, 톨스토이, 간디, 러스킨' 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것을 삶 속에서 실천했다. 1900년대 초반은 미국의 본격적인 성장이 시작된 시기다. 자본주의 사회의 폭발적인 성장 속에서 그 성장으로 인해 과연 우리의 삶이 행복한가라는 근원적인 물음을 분석하고 대중들의 삶 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기로 결심하고 이들은 버몬트라는 산골마을에 정착을 한다. 이들이 추구하는 삶은 다음과 같다.

 

-언제나 자연과 벗하고 있을 것

-우리는 결국 하나임을 늘 깨닫는 삶을 살 것

-영적 의식에 열려 있는 삶을 살 것

-노동을 통해 자급자족율 을 최대한 끌어 올릴 것

-자기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할 것(책쓰기, 여행, 독서)

-사회전체의 발전에 늘 열려 있을 것

-필요한 것이 적은 풍요의 삶을 살 것

-한 나절의 절반, 1년의 6개월만 일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들을 할 것

 

30대 중반에 나는 처음으로 이들의 책인 '조화로운 삶' 을 접했다. 자연과 벗하며 순수 영성을 추구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적은 돈으로도 이 모든 것을 이뤄가는 모습이 인상깊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 당시는 흙과 함께 하는 육체노동이 주는 행복과 즐거움에 대해서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아파트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최근 들어 단독생활을 꿈꾸면서 텃밭이나 집짓기에 대한 관심이 생기면서 부터 이들이 실천한 농사나 집짓기가 주는 창조적 기쁨에 대해서도 공감하게 된 것 이다. 알고 보이는 만큼 사랑하는 법이다.

 

이들의 삶은 아주 풍요롭다. 풍요란 가진 것이 많은 삶이 아니라 필요한 것이 적은 삶이다. 자동차와 집을 사기 위해 우리는 일을 더 많이 하고 상대적인 빈곤감을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산 차와 집을 유지하거나 꾸미기 위해 또 일을 더 많이 한다. 하지만 그럴수록 마음은 더 빈곤하다. 그 빈곤함을 채우기 위해 또 뭔가를 사고, 그 뭔가를 사기 위해 점점 일을 더 많이 해야 한다. 톨스토이의 단편집에서 본 욕심 많은 농부를 닮았다. 러시아의 어떤 지방에서는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자기가 걸어서 돌아온 만큼의 땅이 다 자기의 것이 되는데, 만일 해가 질 때까지 출발점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돈만 날리고 땅을 차지하지 못한다. 이 농부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라는 욕심을 부리다가 비록 해가 지평선으로 넘어갈 무렵 출발점에 돌아오기는 했지만 피를 토하고 죽게 된다. 우리의 집착이 곧 고통의 시작이다.

 

스코트와 헬렌은 버몬트의 산골마을로 들어와 식량의 대부분을 자급자족한다. 이들이 농사를 짓는 이유는 이윤을 남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들 두 식구가 먹고 살 최소한의 양식을 얻기 위해서다. 이들의 식탁은 소박하지만 영양가는 아주 풍부했다. 이들은 유기농 재배를 원칙으로 했으며 각종 과일과 채소들을 아주 다양하게 키웠다. 영양에 대해서도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비타민이나 무기질을 충분히 공급받기 위해 조화롭게 작물들을 선별했다. 소식을 했지만 항산화 열매나 풍부한 야채와 채소를 섭취했기 때문에 잔병치례 없이 100살 가까이 살았다. 이들은 자기들의 섭생법에 대해서도 '소박한 밥상' 이라는 책을 집필했으니 관심 있는 사람들은 일독하기를 권한다.

 

그들은 또한 대부분의 물건들을 직접 만들어 쓰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무언가를 만드는 창조적 기쁨을 놓치기가 싫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다. 하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또 그들이 좋아하는 여행을 위해서는 뭔가 생산적인 일을 통한 최소한의 돈벌이가 필요했다. 그들은 지역적인 특성을 잘 살폈는데, 버몬트에서는 풍부한 단풍나무수액을 이용해서 메이플시럽을 전통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서 판 수익으로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현금을 자급했으며, 버몬트에서 '메인' 주로 이사를 한 뒤에는 월귤나무와 블루베리  열매를 팔아서 자금을 충당했다. 어차피 돈을 벌기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들이 원하고 바라는 삶을 즐길 수 있을 만큼 돈을 벌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노동시간을 최소한으로 줄여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와 함께 하는 자연을 최소한으로 훼손할 수 있었다.

 

나는 자연과 여행, 그리고 글쓰기와 독서, 명상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들의 삶에 강한 호기심을 가지고 이 책을 읽었다. 아마 이번 달 안으로 이들이 지은 책들에 대해서 더 많이 탐독을 할 것 같다. 먹거리에 대한 관심도 지대하고 실재로 8년째 건강식을 실천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섭생에도 아주 관심이 많다. 이들의 삶과 다른 것이 있다면 적어도 현재까지는 '자급자족' 부분은 요원하다고 해야겠다. 현재나 은퇴후의 일들 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1시간 이내의 경기도권에 머물 확률이 높기 때문에 농사를 통한 자급자족 생활은 나와 인연이 없지 않을까 싶다. 물론 마당 한 켠에 조그만 텃밭을 가꾸는 창조적 기쁨은 계획하고 있지만 말이다.

 

'조화로운 삶' 이라는 책이 나오고 난 뒤, 이들의 삶을 보기 위해 전 세계에서 해 마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이들의 농장을 방문했다. 이들은 그들의 행복이론을 몸으로 실천하며 우리에게 좋은 본을 보여주었다. 그런 실천, 그리고 그렇게 존재함을 통해서 그들은 행복과 풍요에 관한 우리들의 일반적인 상식을 보기 좋게 뒤집었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풍요롭고 행복한 줄로 알았다. 그리고 그런 삶을 추구하며 산다. 하지만 아무리 채우고 달려도 행복과 풍요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병폐에 눈을 뜨고 지쳐갈 즈음에 이들의 삶은 아주 신선하게 우리에게 다가왔다. 단지 이론이 아닌 삶으로 이들은 자신의 풍요와 행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은 자연을 충분히 즐기고, 일을 고됨이 아닌 자연과 함께 하는 기쁜 행위로 받아들였다. 그들 스스로의 먹거리를 자신의 땅에서 자신들의 땀으로 일구면서 진정한 평온과 행복, 그리고 풍요를 얻을 수 있었다. 그들은 욕심만 버리면 적게 일을 하고 진정 자기가 원하고 바라는 일들을 더 많이 하는 그런 복된 삶이 뭔지를 보여주었다. 그들은 걱정이 없었다. 굳이 뭔가를 더 많이 저축하고 쌓아놓을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경험을 통해 자연은 우리가 살기에 충분한 무언가를 언제나 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또한 그 지역에서 나는 재료를 이용해서 그들만의 집을 지었다. 직접 나무를 자르고 돌을 골라서 친환경적인 집을 창조했다. 이쁜 돌담은 몇 년동안 쉬엄 쉬엄 일하며 작품처럼 만들었으며 이러한 그들의 일상을 글로 남겨 많은 사람들한테 전하고자 했다.

 

스코트 니어링은 스스로의 의지로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했다. 스코트는 자기가 이 지구에서 생산적인 일을 하지 못하고 남들의 도움 만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그때는 미련 없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를 바랬다. 어느 날 스코트는 생산적인 일은 커녕, 밥을 먹거나 옷을 입거나 하는 일상적인 일에서도 남의 도움을 받아야 할 정도로 노쇠한 자기를 발견했다. 단지 일어나 앉아 숨을 쉬는 것이 유일하게 자신이 할 줄 아는 일이었다. 그의 나이 100살이 되던 해였다. 그는 단식을 선택했다.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지구별 여행을 마쳤다. 그는 죽기 전에 늘 부탁을 했다. 죽자마자 아무런 절차 없이 관 속에 넣어 바로 화장을 해서 자기 집 앞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자기를 뿌려달라고 했다. 육적 몸이 진정한 내가 아님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니어링 부부의 삶은 충만하다. 풍요롭고 때로는 경이롭기 까지 하다. 그들의 삶은 건강하고 성실하다. 그들은 단순함, 그리고 자연과 함께 벗하는 삶, 덜 필요함으로 인해 더 풍성한 삶,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의식주를 해결할 때 오는 원초적 기쁨을 우리에게 삶으로 보여주었다. 그들의 삶 만이 진실일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정의로운 삶을 살았다. 그들은 소수의 삶을 살았지만 누구보다 더 풍성한 삶을 살았다. 모두 다 개발과 발전, 그리고 성장에만 초점을 맞추고 살지만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을 때, 느리지만 풍성하게 사는 삶 속에 행복이 있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삶을 통해 우리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의 삶은 우리 인류에게 충분하고도 남을 역할을 했다. 천편일률적으로 아무 생각없이 맹목적으로 가다 보니 그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이 실은 낭떠러지 일 수도 있겠다는 의심을 예전에는 전혀 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의 삶 이야기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그리고 상당부분 그들의 삶 이야기를 체화 하여 나만의 아름다운 삶으로 승화시키고 싶은 순수한 열망이 올라오는 요즘이다. 그들의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행복했고 풍요로웠다. 비록 나 보다 앞서간 사람들이지만 시간을 초월해 공명하는 뭔가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당분간 그들의 삶에 대해서 조금 더 탐구해 볼 생각이다. 그 안에서 나만의 독특한 행복의 삶이 나올 것을 생각하니 벌써 기분이 좋아지는 하루다. 자연과 벗하는 삶, 소박하지만 풍요로운 삶, 색깔있는 삶에 대해 끌림이 있는 사람이라면 니어링 부부의 책들인 '조화로운 삶, 이 책, 소박한 밥상, 조화로운 삶의 지속' 들을 읽어보기 바란다.

 

안광호

[주제어] 틱낫한, 플럼빌리지

khajoh@naver.com

[칼럼니스트 소개]

안광호 박사는 포항공대 전자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삼성전자에서 5년 동안 통신용 반도체를 개발했습니다. 그중 5제품을 양산하여 국가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세계최초로 CDMA1 Chip Transceiver 를 개발한 경험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2006년부터, 지식경제부산하 국가연구소인 '전자부품연구원'에서 팀장으로 근무하며, 국가의 미래 먹거리 창출을 기획하고, 선도형 기술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잘산다는 것이 뭘까? 대한 순수한 탐구욕을 가지고 있으며과학의 바탕위에 심리의 지평을 열고, 영성으로 하나가 되는 의식의  통합에 깊은 관심이 있어 이에 대한 연구와 수련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저서로는[알아차림, 매일경제신문사], [소프트마인드, 비전과리더십], [마음세수, 예문당], [삼성붕괴시나리오, 다산북스], [열다섯 살 꿈의 시크릿, 미래지식], [긍정, 원앤원북스], [나를 행복으로 이끄는 도전, 에이원북스], [6 시그마로 부자아빠 되기, 네모북스], [행복한 사과나무 이야기, 아름다운사회] 가 있으며, [꿈과 성공이 있는 명품인생] 이라는 오디오북을 발간하였습니다. 2007년 헤럴드 경제가 주최하는 한국의 아름다운 사람’ 20인에 선정된 바 있습니다.

컨설팅, 코칭, 집필 및 칼럼에 대한 문의 및 의뢰는 khajoh@naver.com, 홈페이지: www.akh.co.kr, 블로그: www.doctorahn.co.kr, 페이스북:www.facebook.com/kwanghoahn1, 트위터:www.twitter.com/kwanghoahn

 

[과학과의 통합을 위한 그의 독창적 행보]

  • 6 Sigma Black Belt 획득
  • STRONG(직업흥미프로그램) 전문 지도자 자격 획득
  • 한국심리학회 MBTI 전문 지도자 자격 획득
  • 초기 원형 에니어그램 수련
  • 위빠사나 명상 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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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경계_켄 윌버_안광호_의식경영연구회

독서리뷰 2013.03.22 18:30

 

무경계[켄 윌버, 정신세계사]

출처: 안광호 의식경영연구회 (www.akh.co.kr)

 

켄 윌버라는 이름이 처음 내 귀에 들어온 것은, 한 지인이 나를 보고 켄 윌버를 닮았다는 말을 했을 때 였다. 그의 사진을 들고 가족들에게 이야기 했더니, 아이들이 까르르 웃으며 특히 아빠가 꾸지람을 할 때는 거의 쌍둥이 같다는 반응을 보였다. 여하튼 켄 윌버는 심리학 분야에서는 대가의 반열에 오른 인물로 평가를 받는 사람이다. 23세에 노자의 도덕경을 읽고 생물학 박사과정을 중단하고 독학을 결심한다. 하루 열시간 이상을 집필과 독서에 몰두하고 2시간여 명상과 참선 수행을 한다. 그는 이런 결심 후 불과 3개월 만에 육필원고를 완성하고 2년 뒤에는 타이핑까지 마무리 짓는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나온 책이 오늘 소개할 무경계의 전신인, ‘의식의 스펙트럼이다. 20대 초반의 첫 작품 하나로 그는 대가의 반열에 올랐다. 그의 이 책은 인간의식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꾼 책으로 평가를 받는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심리학, 철학, 인류학, 동서양의 신비사상, 포스트모더니즘 등을 총망라하여 인간의식의 발달과 진화에 대한 통합이론을 제시하였다. 이 책은 유수한 심리학자들로부터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그는 일련의 연구와 집필을 통해서 통합심리학의 개척자로 알려져 있다.

 

오늘 소개할 무경계는 그의 첫 작품인 의식의 스펙트럼의 대중판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첫 작품이 학문적 색채가 강하다면 무경계는 대중을 배려한 책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말랑말랑 하게 쉽게 넘겨지는 책은 아니다. 평소 인간의식, 심리, 과학, 영성의 통합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그의 이 책을 들자마자 흠뻑 빠져들었음을 고백해야겠다. 그는 나와 같은 에니어그램 5유형으로 분류가 되는 사람인데, 그런 영향 때문인지 인간의식에 대한 분석적 저술과 글의 분위기도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는 이 책에서 정신분석, 선불교, 게슈탈트치료, 초월명상, 실존주의, 베단타등 동서양의 심리학과 정신요법, 그리고 신비사상을 총망라하여 다루고 있다. 한 인간이 독학으로 이 모든 분야에 정통해 질 수 있었던 것은 하루 10시간 이상의 엄청난 분량의 독서와 집필 때문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의식적으로는 잠재의식è자의식è초의식의 실체에 대해서는 전개아è개아è초개아를 심리적으로는 본능è에고è신성으로의 합일을 다루고 있다. 그의 저술 방식 자체가 한 가지 사실에 대한 반복적인 강조이기 때문에 내용의 어려움과 상관없이 그가 주장하고 있는 바가 무엇인지를 파악하기는 쉽다. 또한 한 장이 끝날 때마다 친절하게도 그가 참조한 중요 저서들을 친절하게 소개해주고 있기 때문에 이 분야의 지평을 넓히는데도 큰 도움이 되리라 사료된다. ! 그럼 함께 이 책에 대해서 좀 더 상세히 살펴보자.

 

[나는 누구인가? Who am I ?]

32세 이후부터 내가 가지고 다닌 생의 화두가 바로 이것이다. 물론 내가 가진 의식수준에 따라서 같은 질문이라도 들리는 답은 달랐음을 밝힌다. 초창기 무렵 내가 삶에 이 물음을 처음 던진 이유는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개성, 적성, 에고적 성향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30대 중반 이후 영적세계와의 접촉 이후, 이 질문은 지금까지 나를 이끄는 구도의 등대이자 나침반이라 할 수 있다. 아마 이 지구에서의 삶이 다 하는 날까지 늘 가지고 다녀야 할 뿌리질문이 아닐까? 그냥 이 질문을 던지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는가? 뭔가를 생각하고 설명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를 묘사하거나, 설명하거나, 또는 내적으로 느낄 때마다. 우리는 마음속에 있는 내적경험의 세계에다 일종의 정신적인 선이나 경계를 긋는다. 그 선의 안쪽은 라고 생각하며, 그 밖은 이라고 착각을 한다. 통상 정체성의 위기는 이 선을 어디에다 그을지 모를 때, 일어난다. 보통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긋고 있는 경계는 바로 피부경계선이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몸을 나의 것으로 이해한다. ‘나의 것이라는 것은 또 정의상 나의 바깥에 있는 그 무엇을 지칭할 때 쓴다. 즉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내 몸 또한 진짜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진짜 내가 아닌 몸은 어떨 때는 즐거움의 원천이었다가 늙고 병들게 되면 두려움을 주는 그 무엇으로 탈바꿈 하기도 한다.

 

우리는 이렇게 알게 모르게 마음, 즉 에고를 자기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이렇게 살아가면서 전유기체를 하나의 심상이나 이미지로서 대하게 된다. 심지어는 에고를 자신이라고 생각하면서 몸을 에고의 노예처럼 부리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치지 않는다. 마음에서도 또 경계선을 긋는다. 소위 말해서 드러내고 싶지 않는 것들을 소외, 억압, 분리하고 투사하기 시작한다. 마음에서 선택적으로 추출된 자기개념을 저자는 페르소나라고 정의한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마음의 일부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경계를 긋고 그 경계의 바깥을 적으로 인식한다. 따라서 평소에 무의식 중으로라도 그 경계를 어디에 긋는지는 중요하다. 몸이 나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환경을 적으로 이해한다. 한편 에고 수준에 있는 사람은 환경 뿐만 아니라 자기의 몸도 똑같이 이질적인 대상으로 바라본다. 페르소나 수준에 있는 사람은 여기에 정신 내부의 원치 않는 부분까지 적으로 간주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그림자라고 표현한다. 내 안의 일부이나 배척하고 싶은 마음이나 성격들을 일컫는다.

 

경계선을 어디에 긋고 있느냐에 따라서 상담이나 치유의 방법도 달라진다. 정신분석과 종래의 심리치료 기법 대부분은 페르소나와 그림자를 재통합시켜서 강하고 건전한 에고를 만드는데 역점을 둔다. 하지만 인본주의적 치료의 대부분은 에고와 신체의 분열을 치료하는데 목적을 둔다. 여기서 더 나아가 유기체와 외부환경과의 분리를 치료해서 온 우주와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선불교, 베단타 힌두교, 명상, 요가등의 방법들이 동원되기도 한다. 저자는 삶에서의 성장은 결국 경계의 확대를 의미한다고 기술한다. 경계의 확대를 통해서 우리는 점점 더 풍요로워질 수 있다.

 

[삶의 대극에 대하여]

성서에 의하면 아담에게 부여된 첫번째 사명은 동식물에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었다. 결국 그는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경계를 창출했다. 삶의 대극도 마찬가지다. 대극이 생기는 이유는 우리가 개념적으로 경계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경계를 허무는 순간 대극도 보기 좋게 사라진다. 하지만 아담은 이름짓는 권능을 오버해서 사용해 버렸다. 건드려서는 안 되는 선과 악이라는 경계마저 만들어버리고 스스로 수치심과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즉 그가 만든 대극의 개념이 이제 그를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식과 에고의 최초 탄생이자 우리의 삶이 에고라는 개념의 노예가 되는 시작인 것이다. 그래서 삶에서 극단은 언제나 위험하다. 하나를 강조하고 나머지를 배척할수록 대극의 ‘Contrast(대비)’ 는 더욱 더 선명해질 뿐이다. 시계추의 진자 처럼 극단의 에너지는 언제나 반대로 강하게 갈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하다. 극단적 금욕주의자들이 어떤 계기에 의해서 쾌락주의자로 돌변하는 이치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정적인 것을 파괴하려는 시도는 동시에 긍정적인 것을 즐길 가능성도 파괴하였다. 인류는 수세기 동안 긍정적인 것 만을 강조하고 부정적인 것들을 배척해왔지만 그 만큼 옛날보다 더 행복한지는 의문이다. 결국 경계를 허물고 그 둘을 하나로 통합되는 의식의 성장이 중요해지는 것이다. 지금 내가 행복하고 평안하다면 그 배경에 불편함과 고통이라는 배경이 있음을 인정해야 된다. 행복이라는 배경에서 내가 행복하다면 과연 우리가 그것을 행복이라고 느낄 수 있을까?

 

물론 살기 위해서는 선을 긋고 이름을 붙여야 하지만 그 선을 경계로 받아들이거나 집착의 도구로 이용해서는 곤란하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 하나의 세계로부터 두 개 또는 여러 개의 세계를 개념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진실이 모순되는 괴로움에 시달리게 된다. 인간은 스스로 만든 경계라는 올가미에 갇혀 힘들게 지내는 것이다. 결국 진정한 자유와 해방은 부정적인 것으로 부터의 해방이 아닌, 긍정과 부정이라는 양극으로 부터의 해방임을 알아야 한다. 미숙한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천국은 부정적인 요소가 하나도 없는 긍정적인 상태가 아니라, 대립없음 즉 비이원성이 실현된 상태로 봐야 한다. 빛과 그림자는 결국 서로 다른 것이 아닌 동일한 것의 다른 측면일 뿐이다.

 

너희가 둘을 하나로 만들 때, 안을 밖처럼, 밖을 안처럼, 위는 아래처럼 만들 때,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만들 때, 너희는 그 왕국에 들어가리라

 

[무경계 영토]

경계는 이렇듯이 실재의 산물이 아닌, 환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비록 환상이기는 하지만 경계에는 정치적인 힘과 기술적인 힘이 수반된다. 예를 들어서 무언가에 대한 통제력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일단 통제의 대상을 만들기 위해 경계를 그을 수 밖에 없다. 즉 우리는 이렇게 통제하려는 대상으로부터 끊임없이 자신을 분리시키고, 소외시킨다.

 

아담이 이름짓기를 통해 원초적 경계를 설정했다면, 피타고라스는 그 이름에 숫자개념을 다시 도입하였다. 수는 사물을 획일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힘의 대가로 우리는 더 깊은 관념화에 빠져버렸다. 10 마리의 라고 지칭할 때, 그 소는 우리의 관념에서 이미 같은 그 무엇이다. 이렇듯이 수를 세는 것은 경계 위에 세워진 또 다른 경계인 메타경계라 할 수 있다.

 

에 대한 개념의 도입으로 인간들은 자연에 대한 지배를 더욱 강화할 수 있었다. 이와 동시에 광범위한 소외와 단편화 역시 진행되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수, 계산, 측정과 같은 메타경계는 1,600년경 갈렐레오와 케플러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실제로 사용되지 못했다. 중세교회의 영향으로 측정이나 과학적 셈법에 대해서 등한시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는 메타경계와 더불어 대수학이라는 메타-메타 경계가 다시 출현하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첫번째 경계가 이름이라는 범주, 두번째 경계가 라는 범주의 범주, 그리고 세번째 경계가 변수라고 불리는 범주의 범주의 범주라 할 수 있겠다. 대수학을 사용함으로써 이론, 법칙, 원리 등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는 또한 엄청난 기술력과 정치적 힘을 가져다 주었다. 켄윌버의 표현처럼 아담이 별들의 이름을 지었고, 피타고라스는 별들을 셀 수 있었지만, 뉴턴은 별들의 무게와 속도를 잴 수 있었다. 하지만 인류는 자연을 지배할 수 있었던 반면, 자신을 자연으로부터 근본적으로 분리해야만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경계의 해체에 대한 암시들이 과학자들 사이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의 발견자들인 아인슈타인, 슈뢰딩거, 에딩턴, 드 브로이, 보어, 그리고 하이젠베르크등이다. 고전물리학자들은 우주를 시간과 공간이라는 명확한 경계에 따라 서로 분리된 사물과 사건이 정교하게 조합되어 있는 그 무엇으로 보았으나 이 법칙이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된 것이다. 고전물리학자들은 원자를 태양계의 축소판으로 보고자 했으나, 단지 주변 환경 속으로 한없이 녹아드는 성운 처럼 보일 뿐 이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원래의 경계가 거짓일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최초로 품기 시작했다. 켄윌버의 표현처럼 소립자 당구공이 기존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애당초 당구공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원자차원의 것들의 위치를 설정할 수 없는 것은 한마디로 그것이 경계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확률과 통계였다.

 

켄윌버는 현실세계가 상상의 산물이라기 보다는 경계가 상상의 그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양자역학이나 상대성 이론을 연구한 과학자들 중에는 노자선불교에 빠진 이들이 많다. 그들이 과학적으로 발견할 것들이 몇 천년 전의 경전들에 그대로 기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은 아무런 결핍도 빠짐도 없이 완전무결한 상태로서 다른 사물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입자와 파동의 동시성, 불확정성의 원리, 플렉탈 구조, 홀로그램 구조와 같은 것들이 전일적으로 다 나타나 있다.

 

겉모양이 사라지고 모든 분별이 사라질 때 그곳에 남는 것이 사물의 진정한 본성이다. 결국 실재라는 것도 사고와 개념의 공상태로 가야만 그 연후에 경험되어 지는 것이다. 경계가 없기에 텅 빈 것 같지만 경계없음으로 하나다. 불교에서의 을 켄윌버는 무경계로 이해했다. 모든 실체가 단순히 어디론가 사라져버리고 뒤에 ()’ 라는 순수한 진공, 분별할 수 없는 일원성의 혼돈만 남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결국 우주속의 모든 대상은 단지 단일한 에너지의 다양한 형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무경계 자각]

합일의식의 회복을 위해서는 아담이 만든 최초의 경계를 허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실재는 이것보다 더 쉽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우리는 최초의 경계를 파괴하기 위해 고생할 필요조차 없다. 왜냐하면 애당초 그런 경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의 환상이다. 환상은 뿌리째 뽑아 근절시킬 성질의 것이 아닌, 그 자체를 이해하고 꿰뚫어 봄으로써 사라지는 그 무엇이다. 따라서 요가, 정신집중, 기도 등에서 이러한 환상을 파괴하려는 시도가 오히려 환상이 있다는 착각을 강화할 수도 있음을 알아야 겠다.

 

합일의식을 가로막는 주된 장애물은 스스로를 고립된 개체로 느끼는 감각이다. 귀를 예로 들어보자. 주변의 소리들 중에서 아무리 신중히 주의를 기울이더라도 들을 수 없는 한 가지 소리가 있다. 우리는 듣는 자를 들을 수 없다. 우리가 듣는 자를 들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듣는 자가 따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주관적인 듣는 자를 아무리 들어보려고 애써도 들리는 것은 객관적소리 뿐이다. ‘경험하는 자를 찾으려 해도 우리는 늘 또 다른 경험만을 발견하게 되며, 주체와 객체는 언제나 하나의 존재라는 사실만이 폭로된다. ‘를 찾으러 할 경우, 발견하는 것은 언제나 내가 없다는 사실 뿐이다. 결국 실재라는 것은 주체성과 객체성 모두를 초월해 있으면서 그들을 자유롭게 창조하고 활용하는 절대적 주체성이다. 언어로는 이 세계를 표현할 방법이 없다. 이는 마치 포크로 물을 떠 올리는 것과 같다. 절대적 주체성은 보여지거나 들리지 않는다. 보여지고 들려진다는 것은 다 상대적인 것이다. 내 몸, 내 마음, 내 생각, 내 욕망들도 따라서 내가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객체로써 주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상대적 대상으로써 이것들을 발견할 수 없는 이유는 사실 단순하게도 이것이 모든 대상 그 자체기 때문이다. 텅 비어 있지만 하나다. 내면의 진정한 나가 실재로는 외부의 현실과 하나며, 그 역도 마찬가지로 성립한다. 책에서 나온 에르빈 슈뢰딩거의 표현처럼 대지위에 자신을 던져 어머니인 대지 위에 몸을 눕히면, 우리는 그녀와 하나이고 그녀 또한 우리와 하나임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무경계 순간]

이름 붙이기와 함께 우리가 즐겨 긋는 경계가 있다면 바로 시간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통상 영원이란 끝없이 이어지는 시간이라 알고 있지만, 실은 시간 밖에 존재하는 자각이라는 표현이 훨씬 더 적합해 보인다. 그리고 순간이란 시간 속의 찰나가 아닌, ‘시간 없는 찰나가 더 맞을 것 같다. 우리는 누구나 시간이라는 개념과 함께 살아가지만, 가끔씩은 특별하게도 시간성의 초월을 경험하기도 한다. 내가 다닌 대학원은 전원 기숙사를 제공하는 곳이었는데, 그때 서른이 다 되어서 처음 연애를 시작한 한 형의 연애담은 무시간성 경험의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포항에서 부산까지 애인을 데려다 주기 위해 고속버스의 가장 뒷칸에 앉았다가 첫 키스를 경험하게 되었는데, 키스를 시작하자 마자 부산에 도착해 있었다고 했다.

 

영원이란 이렇게 시간을 초월한 순간의 본질이며, 따라서 시간의 경계에 대한 해방은 지금외에는 언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영원은 언제나 이미 지금이다. 하지만 우리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희망 또는 걱정으로 순간을 놓친다. 시간이 만들어 놓은 장치에 철저하게 의심도 없이 묶여 있다. 무시간의 현재순간에 접촉을 하기 위해서는 즉각적 현재에 대한 오롯한 주의가 필요하다. 하지만 켄윌버는 이런 주의가 핵심에서 벗어난 시도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 ‘이 순간에 접촉하려는 노력은 자주 또 다른 지금 이 순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렇다. 즉 시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다시 시간을 이용하게 된다. 단지 주의깊게 바라만 보면 시간에 대한 통찰이 일어날 것이다.

 

과거란 그리고 미래란 과연 있는 것인가? 사람은 감각의 인지를 통해서 개념을 받아들인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등의 일련의 행위에서는 오직 순간밖에 없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과거의 실재에 대해서 말해주고 있는 증거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기억이다. 이 기억이라는 것이 없다면 시간 개념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기억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자. 기억마저도 현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순간의 내 느낌이나 경험에 비추어 과거가 다르게 색칠되는 것이다. 만일 지금 내가 아주 풍요롭고 기분도 좋다면 과거의 힘들었던 기억은 아름답고 감사한 추억으로 느껴질 것이다. 이에 반해서 지금 내 처지가 나락으로 떨어졌다면 과거의 그 기억도 힘듦으로 채색될 것이다. 신비가 들은 그래서 기억 자체도 현재 경험임을 강조한다. 모든 헤어진 첫 사랑은 서로에 대해 사실 보다 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우리는 진짜 과거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현재의 흔적을 보고 있다. 단지 현재 속의, 그리고 현재의 한 부분으로서의 과거를 아는 것 뿐이다.

 

기억으로서의 과거와 예견으로서의 미래가 모두 현재의 사실이라는 점은 모든 시간이 현재에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여기서의 순간은 그저 1초 정도 지속하다 순식간에 스쳐가는 그런 순간이 아니다. 이런 현재를 저자는 덧 없는 존재(눙크플루엔스:Nunc Fluens)’ 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Big Bang’ 또한 현재의 사실이며 활동인 것이다. 영속적으로 활동하는 최초의 원인인 근원적 경계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서의 우리의 행위인 것이다. 순간은 과거와 미래 사이에 끼인 샌드위치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상징으로서의 기억과 실제 사실을 혼돈함으로써 무시간적 현재에 하나의 경계를 설정하고 있다. 이런 기억으로서의 과거가 현재경험이라는 통찰이 일어나면 과거라는 뒤쪽의 경계는 없어진다. 미래라는 앞의 경계도 마찬가지다. 그냥 스쳐가는 현재가 무시간적 현재로 바뀌는 것은 바로 이때다. 이런 무시간적 현재를 우리는 눙크 스탄스라고 한다. 지금 이 순간에 아무런 경계도 없어지는 것이다. 순간에 대한 자각이 바로 합일의식의 시작이다.

 

누가 우리에게 당신은 누구인가?’ 라고 물으면 우리는 우리의 직업, 성별, 역할등을 말하기에 바쁘다. 이 모든 것들은 사실 기억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기억들은 우리를 지속적으로 경계 짓는다. 우리는 자주 분리된 실체감을 느낀다. 우리의 기억이 현재경험밖에 있다고 착각하기에, 기억으로서의 나 또한 현재경험의 밖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 합일 될 길은 요원하기만 하다.

 

 

[경계의 생성과 전개과정]

자아(에고)’ 를 진정한 로 정의하는 정통 심리학에서는 합일의식을 정상성의 상실로 이해한다. 이 또한 사람들이 만든 하나의 틀이자 경계인 것이다. 혹자는 여기에서 물음을 던진다. ‘왜 근원적 경계가 발생했느냐?’ 고 말이다. 하지만 이 물음은 실상 아무런 의미가 없다. 아무것도 근원적 경계를 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일 근원적 경계에 어떤 원인이 있다면, 그 원인 자체가 새로운 근원적 경계일 것이다. 무시간적 의미로 굳이 위의 질문에 답을 하자면, 근원적 경계는 우리 자신의 현재의 활동, 즉 원인 없는 활동 그 자체로서 스스로 발생한다.

 

몸나의식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은 몸나 밖의 것을 암묵적으로 으로 간주하게 되어 있다. 나를 드러내기 위한 정복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또한 몸나의 소멸을 진정한 나의 소멸로 보기 때문에 죽음과, 늙음과 병듦에 대한 공포와 불안감이 생겨난다. 탄생과 죽음이 특별한 의미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본 것과 같이 합일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탄생과 죽음 또한 거저 지금 이순간에 있어서는 하나일 뿐이다. 탄생이 곧 죽음이요, 죽음이 곧 탄생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어떤가? 현재순간에서 죽음의 냄새를 맡지 않기 위한 하나의 약속으로서 미래를 요구하게 된다. 인간은 죽음을 거부하고, 미래 없이 살기를 거부하며, 이 말은 시간없이 살기를 거부한다는 뜻에 다름이 아니다. 시간은 이제 인간의 가장 소중한 소유물이 되어 버렸다. 미래를 끊임없이 요구한다는 것은 매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미련과 미완성 속에서 산다는 말이다. 우리는 한때 과거에 존재했었으며 따라서 내일도 존재하리라는 하나의 보장된 기억에 매달린다. 그렇지만 잘 생각해 보자. ‘분리된 나가 본래 환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분리된 나의 죽음 또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생전 두려워 떠는 것은 그 환상에 대한 인상일 뿐이다. 이를 받아들이는 순간, 더 이상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떨지 않게 되며 그 에너지를 오롯이 순간에 집중할 수가 있다.

 

! 조금 더 나아가 보자. 그리스신화 에서 켄타우로스가 있다. 반은 사람이고, 반은 말인 전설적인 동물인데, 헤라클레스를 죽이는 역할을 한다. 심리학적으로 이 켄타우로스는 몸과 마음의 완벽한 통일과 조화를 상징한다. 한마디로 심신의 통일체. 그런데 몸나의식에서 그 몸 내부에 하나의 경계를 우리는 긋는다. 이 선을 긋는 순간 자아라는 개념이 생겨난다. 켄타우로스가 갈라지는 순간이다. 우리는 몸이라는 전유기체의 일부인 자아를 진정한 우리로 생각하는 것이다. 왜 이렇게 가려고 할까? 이 또한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우리는 영속적이고, 정적이며, 불멸하고, 동요됨 없는 어떤 것을 찾는다. 이때 상징, 개념, 관념은 이러한 목적에 부합하는 아주 좋은 것들이다. 우리는 하나의 관념을 중심으로 우리의 정체성을 이렇게 확립하는 것이다. 더 이상 죽음이 뻔한 신체와의 동일시를 거부하고, 그 신체를 지배하려고 한다. 육체의 욕망의 더럽고, 영혼의 바람은 깨끗하다는 식의 논리가 성립되는 순간이다. 한쪽에는 강박적이고 왜곡된 사고와 또 한쪽에는 분리되고 버림받은 몸이 존재한다. 심지어는 몸의 감각들도 왜곡시킨다. ‘감각의 섬세한 알아차림의 기능도 퇴보한다. 이는 영적의미에서 보더라도 엄청난 퇴보다.

 

자아 개념이 생겨날 때, 여러 자아가 혼재하게 되며 억제된 욕망에 대한 투사도 겸하여 생긴다. 자아 안에서도 취사선택을 할 수 있게 된다. 대체로 인간은 자기의 피하고픈 성향들을 밖으로 내몰게 된다. 즉 자기의 어둡고 부정적인 이미지인, 그림자를 밖으로 내몰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내몬 그림자를 다른 사람한테 덮어 씌우고서야 안심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원래 내 것인 그림자가 없어지겠는가? 자석처럼 내 몰아도, 내 몰아도 다시 찾아와서 나를 힘들게 한다. 그냥 안아주고 인정하면 그 뿐인데, 안 받겠다고 발버둥을 치다가 한 평생을 허비한다. 이제 인간은 자아 내부에서도 자기가 스스로 정한 이미지인 페르소나만을 진짜 자기로 착각한다. 이렇게 협소해 지면 질수록 자기의 적은 더 많아진다. 처음에는 환경이 적이었다가 그 다음은 환경과 내 몸이, 그리고 그 다음에는 환경, 내몸, 내 그림자 모두가 적이 된다. 세상 살기가 점점 더 힘들어진다는 소리가 나올 만 하다.

 

[발견의 출발점]

스펙트럼 상의 하강 (의식적으로는 성숙) 은 삶에 대한 불만이 인식될 때 시작된다. 불만과 괴로움은 사실 좋은 신호다. 그것은 변화하라는 강력한 메시지다. 전적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성장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되지만, 거부할 경우 점점 더 나락으로 떨어질 뿐이다. 켄윌버의 말 처럼, ‘고통은 최초의 은총이다. 이러한 신호를 치유를 통한 성장의 기회로 삼아야 하는데, 각각의 단계에서 경계의 해체와 통합을 통해 치유가 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페르소나, 자아, 유기체, 합일의식 각각의 단계별 증상에 대한 맞춤의 치유가 필요하다. 여러 다양한 치료기법들도 이런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스펙트럼의 하강은 투사를 재소유함으로써 경계를 해체한다는 뜻이다. 자 그럼 페르소나 수준의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자. 페르소나는 자신의 특정한 성향을 스스로 부정할 때 만들어진다. 하지만 아무리 부정해도 이런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 페르소나와 그림자의 투쟁이 시작된다. 자기 것인데 아니라고 남들한테 투사하고는 갈등의 원인을 남들 때문이라면서 그 남들과 싸움을 벌인다. 나의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 아이가 보기 싫어서 학대하는 부모의 경우가 이런 투사의 대표적 전형이다.

 

이에 반해 현명한 사람들은 압박감을 느낄 때 마다 그것이 자신의 무시된 동인임을 깨닫는다. 하지만 대부분은 내 것이 아니라고 던져 버리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림자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억울하겠느냐? 한 배에서 나온 자식인데 누구는 집안에서 따뜻하고 배불리 있고, 누구는 찬 길바닥에 내쳐 졌으니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하다. 그래서 얌전히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끌기 위해 끊임없이 소란을 피운다. 그런데 소란을 피우면 피울수록 저항감은 더 세어진다. 하지만 그럴 수록 그림자도 소란만 더 피운다. 이제 나도 그림자를 바라보지만 자기의 것으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림자를 덮어 씌울 다른 사람을 찾는다. 그림자의 투사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투사의 대상을 경멸한다. 우리가 누군가로 부터 언짢은, 때로는 백 명을 붙들고 물어봐도 다 인정하는 억울한 경우를 당해서 마음이 불편하더라도 그 '불편함' 의 근본원인은 자기 자신이다. 이 책에서 켄윌버가 언급했듯이 우리가 '동성애자' 들을 필요이상으로 혐오하는 이유는 혹시 자기 안에도 그런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이라는 그림자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직생활을 하다보면 이런 '투사' 의 대부분은 '뒷담화' 의 형태로 나타난다.

 

'보고 또 보다 보니 비로소 알게 되었다.

내가 너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실은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두려움' 이라는 그림자와 더불어 가장 보편적인 '그림자' 는 바로 '의무감' 이다. 의무감은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은데 해야 하는 경우에 생기는 것으로 이해하지만 저자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 놓는다. 우리가 정말로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으면 의무감 마저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은 우리가 그것을 하고 싶어하는 욕망과 친절함이 있지만 이것이 지운 짐이 부담스러워 의무감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다른 사람들이 우리가 그들을 도와주기를 원한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이 자신은 그런 특성이 없는데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경향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것이야말로 투사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그리고 투사는 언제나 '왜곡' 을 동반한다. 그림자를 투사하여 다른 사람에게 던지는 순간, 우리는 그림자를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증상' 으로 인식한다. 이런 증상을 만나면 불편해서 피하고 싶다. 하지만 인정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런 증상들 자체가 해결의 열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페르소나 수준에서의 치료의 첫 단계는 증상을 받아들이고 여유를 갖는 것이며 증상의 불쾌감과 친해지는 것이다. 이전에 온갖 방식으로 저항해 왔던 이 감정들이 스스로 드러나게 내버려두거나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성화 시키기도 한다. 억압은 탐닉 만큼 에너지를 증가시킬 뿐이다. 단지 왔을 때 만나주면 저절로 떠날 것인데, 집 안에 와 있는데도 못 본 척 억누르다가 엄청난 화를 당하기도 한다. 증상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림자와의 경계가 사라지므로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들도 저절로 해결된다.

 

페르소나 수준에서의 치료의 두 번째 단계는 이런 증상들을 원래의 형태로 해석/변환 하는 것이다. 힘이 들어갔다면 힘을 풀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원래의 자기 동인을 떠 올려 보는 것이다. 이 순간 그 동안 "나는 해야만 해" 라는 억지와 힘과 의무감의 문장들은 "나는 하고 싶어" 라는 자발성, 주인의식, 긍정의 문장들로 바뀌게 된다. 이제 페르소나와 그림자가 합쳐져 '자아' 수준으로 성장을 이루게 된다. '' '' 이 있기 때문에 '' 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하지만 '선과 악' 이라는 대극의 의식을 초월할 때 우리는 성장을 한다. 만일 우리가 누가 죽도록 밉다면, 그 마음 한쪽에는 반드시 죽도록 좋아하는 감정이 있다는 점을 인식하라는 것이다. 이럴 때 선과 악은 통합되어 성숙해진다. 결국 다른 사람이라는 매개체가 있기는 했으나 모든 투쟁은 결국 자신과 자신의 투쟁인 것이다. 매사에 부딪힌다는 것은 그 만큼 내가 성숙하지 못한 증거일 수도 있다. 애벌레 수준의 의식으로는 모든 것이 걸리지만, 나비가 되는 순간 나를 가로막는 장애물은 없어짐을 명심해야 한다.

 

[켄타우로스 수준]

자아수준을 회복했다면 이제 육체와의 경계가 없음을 자각하는 단계가 필요하다. 우리는 말 위에 타고 있는 기수처럼, 우리가 몸 위에 앉아 있다고 착각한다. 어느 순간 신체는 '' 가 아니라 '나의 소유물' 로 전락했다. 하지만 신체와 자아의 '통합체' 야 말로 어느 한쪽보다 더 심층적인 실재다. 이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신체를 회피하는 것은 앞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다. 하지만 신체를 배척하면 할 수록 다시 신체로 되돌아와 그 사람을 괴롭힌다.

 

자아는 '의지적' 이다. 즉 내 마음대로 할 여지가 많다. 하지만 신체는 어떤가? 통제가능한 범위가 정해져 있다. 예를 들어서 맥박을 1분에 1,000 번 이상 뛰게 조절이 불가능하다. 이런 제약성 때문에 우리는 자주 신체를 '내 아닌 것' 으로 느낀다. 자아는 이런 통제가 일부 불가능한 신체를 단지 자기가 아닌 '자기의 것' 으로 만들기 위해 신체를 둔하고 무감각하게 만들어 통제권에 대한 대리 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육체를 무감각하게 만든 결과로 우리는 신체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지만, 또한 신체가 주는 고통도 느끼지 못한다. 이는 또 다른 억압의 전형이다. 우리는 억압이 아닌 만남을 통한 초월을 이뤄야 한다. 이런 초월은 다시금 신체의 감각을 알아차리며 주시하는 것, 그 신체로 부터 야기되는 생각과 감정들을 전체로 인정하고 바라보며, 알아차리는 훈련으로 부터 시작된다. 켄윌버는 신체에 대해서 주의를 가져보라고 한다. 처음 시작을 하면 3분 동안도 신체에 머무르기가 힘듦을 알 수 있다. 고삐가 풀린 망아지처럼 마음은 언제나 왔다 갔다 하며 잠시도 한 곳에 머무르기를 저항한다.

 

최근에 나는 근육을 풀어주는 선생님을 통해 근육이 뭉쳐있는 이유의 대부분은 '스트레스' 때문임을 알았다. 왜 이럴까? 자아와 신체의 분리에서 그 답을 찾아볼까? 적개심이라는 감정이 일어난다고 하자. 분노가 일어나면 우리는 소리치고 고함지르고 주먹을 휘두르는 신체활동으로 이런 감정을 발산하려고 한다. '' 라는 에너지를 알아차림과 바라봄으로 다루는 기술이 없는 대부분은 이렇게라도 발산을 하는 편이 오히려 억누르는 것 보다는 낫다. 그것이 타인에 대한 공격이나 상해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 말이다. 뒷산에 올라가 고함을 지르거나 열심히 운동을 하고 나면 이런 감정들이 해소되는 것과 같은 원리다. ! 그런데 이런 근육활동을 우리는 분노를 억누름으로써 자제를 한다. '근육의 해소활동' 을 억압하는 것이다. 그런데 '근육의 해소활동'   다른 근육을 무의식적으로 사용함으로써만 제어가 된다. 이제 화를 냈을 뿐인데, 근육과 근육간의 긴장과 전쟁이 초래한다. 이는 마치 자동차의 가속기와 브레이크를 함께 밟는 것과 같은 이치다. 결국은 아무런 움직임도 만들어내지 못한 채 엄청난 양의 에너지만 소모하면서 잔뜩 긴장된 교착상태로 모든 것이 끝나 버린다. 근육에 감정으로 인한 긴장이 고스란히 남아 뻣뻣하게 굳는다.

 

통상 눈 주위의 긴장은 울고싶은 욕망을 참는 것이고, 관자놀이에서의 긴장은 소리치거나 고함지르고 싶은 것에 대한 저항을 의미하며, 어깨와 목의 긴장은 억제된 분노나 두려움 적개심을 나타내며, 횡경막의 긴장은 호흡을 만성적으로 참고 있음을 암시하며, 아랫배와 골반 주변의 긴장은 성욕에 대한 모든 자각이 차단되었다는 신호이며, 다리의 긴장, 뻣뻣함, 그리고 힘이 없는 느낌은 확고함, 안정감, 확실성 또는 전반적인 균형의 결여를 나타낸다.  이런 근육이 고착화되는데 까지는 평균 15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이 말은 아주 많은 의도적인 노력을 통해 자아와 신체의 긴장과 갈등을 해소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런 신체적, 근육적 긴장을 풀 수 있는 방법으로 켄윌버는 오히려 그 긴장을 의도적으로 강화시킬 것을 주문한다. 의식적으로 강화시키면 묻어있는 감정들이 표면에 떠오르기 시작한다. 이것을 잘 알아차리기만 해도 긴장은 저절로 해소된다. 끊임없이 무의식적으로 볼펜을 돌리는 아이가 있었다. 어느 날 그 선생님이 그 아이한테 벌을 주었는데 수업시간에는 1초도 쉬지 않고 볼펜을 계속 돌려라고 주문을 했다. 만일 그만두면 체벌을 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의식적으로 볼펜을 돌리니 이내 흥미가 없어졌고 그 아이는 그 버릇을 싹 고쳤다. 일부러 특정 근육의 긴장을 강화시킴으로 인해서 감정을 억제하려고 애쓰는 자신의 일부를 감지할 수 있다. 감정을 잘 만나야 넘어간다. 억제하기 시작하면 굉장한 압력으로 언젠가는 '' 하고 터져 버린다.

 

일상적인 문제와 근심거리 등이 대부분 자아의 간섭에 의해서 야기된다는 저자의 주장은 한 번쯤 곱씹어 볼 대목이다. 사실 자아는 삶 속에서 끊임없이 행복, 쾌락, 기쁨을 만들려는 시도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시도가 무의식적으로는 '결핍감' 을 야기한다. 이미 이대로 충분한데 자꾸 뭔가를 찾음으로써 현재에 대한 불만감과 부족감을 불러 일으킨다. 켄타우로스(반인반마) 수준을 회복한다는 것은 정신과 신체의 유기체 내부 전체에 심리적, 신체적 건강이 이미 잘 순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 수준에서는 어제에 매달리거나 내일을 희구하지 않는 살아있는 현재인, '눙크 풀루엔스' 속에 살고 있다. 이 수준은 심리학자마다 다르게 표현하고 있는데, '골드스타인과 매슬로우' '자기실현', '프롬과 리스먼' '자율성', '메이' '삶의 의미' 라는 개념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수준은 인간 잠재력 계발운동, 실존주의, 인본주의 치료법 등이 목표로 하는 그 수준이다.

 

[초월적인 나, The Self in Transcendence]

프로이트가 자신의 뛰어난 연구를 자아, 페르소나, 그림자에만 한정지은 반면, 융은 이런 수준들을 넘어 '초개아수준' 까지 연구영역을 넓혀, '집단무의식' 을 발견했다. 융은 이를 '원형' 이라고 표현했는데 이는 전 인류에 공통된 것이었다. 어쨌던 초개인적, 초개아적, 초월적인 것에 대한 최초의 학문적 접근이었다. '초월적 나' 란 자신의 사적인 마음, , 감정, 생각, 느낌들로부터 초연한 자각의 창조적 중심이자 확장된 자각이다. 나는 순수한 자각의 중심이며, 모든 생각, 감정, 느낌, 욕구에 대한 부동의 주시자다. 이제 내적 자유로움, 가벼움, 해방감, 그리고 안정감을 직관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또한 순수한 합일의식은 아니다. 합일의식 속에서는 초개아적 주시자 자체가 주시된 모든 것과 함께 붕괴된다. 그러나 그런 일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초개아적 주시자를 발견해야 한다. 우리가 자신의 괴로움을 주시할 수 있다면, 진짜 나에게는 괴로움이 없음을, 주시된 혼란에서 자유로운 상태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 된다. 바탕이 흰색이기 때문에 빨간색이 드러난다. 따라서 어떤 상태를 주시하는 것 자체가 그것을 초월했다는 의미다. 이런 초월경험을 통해서 우리의 의식은 '신체와 자아' 너머로 확장되기 시작한다. 이 상태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어떤 행위가 일어나든 단지 그것을 주시하는 것이다. 모든 감정의 한 가운데서 단지 '무집착, 무선택적 자각' 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만일 어떤 감정을 해결하려는 시도를 한다면 이는 자신이 바로 괴로움  그 자체라는 환상만 강화시킬 것이다.

 

이렇게 의식이 확장된다고 해서 페르소나, 자아, 켄타우로스와의 접점을 상실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사이 사이의 경계와 그로 인한 전쟁이 사라질 뿐이다. 접점은 그대로 유지하지만 단지 집착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이제 세계가 사실상 자신의 몸이 되었다. 개아를 초월하면서 부터 '자비' 가 샘솟는다. 이 수준의 사람들에게는 나와 남의 구별이 따로 없다. 내 몸과 같이 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오직 '하나의 진정한 나' 뿐이며, '하나의 나' 가 다양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허구의 나가 죽는 순간, 시간을 초월한 참나를 발견한다. 죽기 전에 죽으면, 죽을 때 죽지 않는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산다는 예수의 말씀도 이와 같다. 이 수준에서는 공간성과 시간성마저 초월한다. 이런 '초월적 나' 를 보는 것은 마치 어떤 수를 써도 무언가를 보는 '내 눈' 을 볼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 수준에서 우리가 할 일은 자신의 기억, 마음, , 감정, 사고와의 잘못된 동일시를 지속적으로 깨는 일 뿐이다. 노력보다 이해가 요구되어진다.

 

[궁극의 의식상태]

창조도 없고 파괴도 없다. 운명도 없고 자유의지도 없다. 길도 없고 도달함도 없다. 이것이 궁극의 진실이다. 인도의 성자인 라마나 마하르쉬가 설한 궁극의 실재다. 이 책의 제목처럼, 합일의식 상태에서는 아무런 경계도 없다고 한다. 하나 하나의 파도는 다른 모든 파도와 다르지만 합일 의식은 거대한 바다다. 물의 성질인 축축함을 찾으려 파도를 계속 옮겨 타는 한, 지금 타고 있는 파도에 그런 축축함이 존재한다는 것을 결코 발견할 수 없다. 물 한가운데 있으면서 목마르다고 애원하며 울부짖는게 깨어나지 못한 우리의 삶이 아닌가? 이미 물 속에 있으니 달리 축축함에 이르는 길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진리를 찾아 나서려 한다. 무언가가 끊임없이 그렇게 조장한다.

 

무언가를 취득하려 해도 아무것도 이룰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지금 상태와 별반 다를 게 없다는 것은, '합일의식' 의 역설이자 아이러니, 그리고 모순이다. 하기야 이 세계가 논리적, 이성적이라면 누구인들 가지 못하랴? 본래의 깨달음은 '영묘한 수행' 이라고 선불교에서는 이야기한다. 즉 우리가 생각하듯이, 그리고 이 글을 적고 있는 나 또한 오류를 범하듯이 '깨달음을 향해' 가는 것이 아니라 '본증묘수' '깨달음으로 부터 샘솟아 나오는 것' 이다. 수행이 합일의식으로 이끌어주는 것이 아니라 수행 자체가 합일의식이다. 영적 수행은 그 자체가 이미 목적지다. 그냥 아버지 품에 있으면 그만인데, 그 품을 떠나왔다는 '착각' 을 하고, 착각을 바로잡기 위한 수행을 또 해야만 하는가? 까발라에서는 이를 '신적합일 체험' 을 통해 그 기쁨의 에너지가 더 증대되기 때문이라고 한다. 켄 윌버는 이를 두고 이렇게 기술했다. "아무리 귀한 보석이라도 그것을 사용하고 표현하고 드러낼 수 없다면 그 세속적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다" 좌선이나 명상은 그런 의미에서 부처가 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자신인 부처와 같이 행동하려고 그렇게 하는 것이다. 우리의 길은 무언가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삶 속에서 순간을 놓치지 않고 알아차려 가는 것이 실로 중요하다. 결국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곧 수행이자 본래 깨달음의 표현이다.

 

! 여기에 아주 중요한 통찰이 있다. 삶이 곧 깨달음과 합일의식의 표현이기에 삶의 어떤 측면을 싫어한다면 (지금의 집, 수입, 배우자, 자식들 등등) 그것은 합일의식의 어떤 측면을 저항한다는 것이다.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이와 같은 저항을 이해하는 것이 깨달음의 궁극적 열쇠다. 저항받는 그것은 언제나 우리의 그림자의 일부가 되고 그 자리엔 상처처럼 '증상' 이 자리잡는다. 그런 의미에서 증상, 상처야 말로 의식의 성장과 확대를 위한 길잡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스스로 만든 증상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모든 각각의 경계에서 우리는 선을 긋고 무언가를 저항하여 그림자로 만들고 그 그림자로 인한 증상으로 고통받음을 알았다. 책에서는 실재치료법들을 중심으로 각각의 경계를 허무는 작업들을 진행한다. 페르소나 수준인 사람들에게 즐겨 사용되는 치유법은 정신분석법의 일종인 '자유연상' 이다. 머리에 떠 오르는 것은 무엇이든 이야기 하게 한다. 처음에는 마구 내뱉다가 어느순간이 되면 혼란상태에 빠진다. 자유연상은 하나의 장치다. 이 장치를 통해서 우리는 '생각에 대한 만성적 검열' 인 저항을 완화시켰다. 일종의 방심인 것이다. 그러다가 그림자 사고가 떠오르고 그 순간 방어수단으로서 갑자기 멍해지는 것이다. 치료사는 이때를 놓치지 않는다. 내담자의 생각 중 어떤 것에 대한 저항감을 살펴보는 작업에 착수한다. 저항을 직시함으로써 자아수준을 회복하는 것이다. 페르소나 수준에서는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야만 자유연상이 가능하지만 자아수준에서는 아주 쉽다. 켄타우로스 수준에서 나타나는 증상은 '신경증' 의 일종인 '회피반응' 이다. 이 수준에서의 치료는 회피의 해독제인 의도적 '집중' 에 초점을 맞춘다. 즉각적 현재와 심신의 자각에 초점을 맞추도록 한다. 게슈탈트 치료는 이 수준의 대표적 치유법이다. 몸과 마음의 전유기체는 현재에 대한 자각이 아주 쉽지만, 만일 자아수준에 머물러 있는 사람이라면 순간에 대한 자각은 아주 어렵다. 자아는 현재경험의 자각과 만나면 쉽게 시들어버린다. 저항은 좋은 것이다. 저항은 의식의 성장과 확대를 위한 발판이다.

 

합일의식의 회복은 적절한 영적수행을 실천함으로써 우리가 합일의식에 '어떻게' 저항하는지 깨닫는 순간 시작된다. 결국 우리가 접근해야 할 것은 '합일의식 그 자체' 가 아니라 '합일의식에 대한 근원적 저항' 이다. 이 저항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에 대한 '총체적 망설임' 이다. 지금 이 현재에서 우리가 보지 않으려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이 저항은 너무나도 '총체적' 이어서 명확하게 자각되기가 참 어렵다.  그래도 우리는 저항을 찾고 또 넘어서 합일의식에 도달하려고 하는데 이는 존재의 순수한 욕망이다. 이런 순수욕망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나타나는 '욕망, 바람, 의도, 소망' 등으로 대리만족되기도 한다.

 

앞서 이야기한 것 처럼 우리는 합일의식을 추구하지만 그 방법 자체가 언제나 발견을 오히려 방해한다. 지금으로부터 달아나려는 노력을 통해 우리는 끊임없이 지금의 '' 에 있다는 환상을 강화시킨다. 아이러니하게 이 달아남은 시간개념을 생성시킨다. 우리의 현재는 조용한 달아남으로 전락하기 시작한다. 달아나기를 멈춘다는 것도 멈춰지는 미래를 가정한 것이므로 '멈춤' 또한 움직임의 또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은 필요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지치면서 알게된다. 다른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결국 어느순간 '분리된 나' 가 언제나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음을 보게된다. 분리된 정체감과 저항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다. 내가 한 모든 행동이 잘못이었던 것은 그 행위자가 '' 였기 때문이다. 이 저항을 스스로 내려놓음 자체가 합일의식의 열림이며 무경계 자각의 실현이다. 유일하게 존재하는 것은 전방위에 전조건으로써 빛을 발하면서 절대적으로 편재하는 '진여' 로서의 의식이자, 일자의 몸짓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그것을 '얻고자 했기' 때문에 얻지 못했다. 합일의식은 언제나 기존의 사실, 진실이여서 우리가 하거나 하지 않는 짓에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음을 깨달을때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경험으로부터 달아나지 않으면 더 이상 경험이 우리를 스쳐가는 것 처럼 보이지 않으며 '시간개념' 도 없어진다. 모든 것이 이미 영원히 (시간을 초월해서) 올바르기 때문에 우리가 하고자 애써온 모든 것은 허망한 것이었다.

 

'억겁이래 나란 놈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니, 죽어도 달리 갈 곳이란 없도다. 아무데도 없도다'

 

[책의 개편에 대해]

-유아적 상태는 '합일의식' 수준으로 인지되고 있지만 이는 큰 오류다. 유아기는 단지 '무의식적 지옥(에고)'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유아기는 초개아 단계가 아니라 전개아 단계, 초합리성이 아닌 전합리성, 초언어적이 아닌 전언어적 단계일 뿐이다. 유아적 나가 평화로워 보이는 것은 천국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지옥의 불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커감으로써 무의식적 지옥에서 의식적 지옥으로 나아가는데 이는 바람직한 것이다. 지옥임을 알기 시작할 때 천국에 대한 최초의 동경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의 지옥과 천국의 하나의 메타포(은유) 임을 잊지 말기를..

안광호

[주제어] 켄 윌버, 무경계

khajoh@naver.com

 [칼럼니스트 소개]

안광호 박사는 포항공대 전자공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삼성전자에서 5년 동안 통신용 반도체를 개발했습니다. 그중 5제품을 양산하여 국가에 기여할 수 있었던 것에 감사하며, 세계최초로 CDMA1 Chip Transceiver 를 개발한 경험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2006년부터, 지식경제부산하 국가연구소인 '전자부품연구원'에서 팀장으로 근무하며, 국가의 미래 먹거리 창출을 기획하고, 선도형 기술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잘산다는 것이 뭘까? 에 대한 순수한 탐구욕을 가지고 있으며과학의 바탕위에 심리의 지평을 열고, 영성으로 하나가 되는 의식의 통합에 깊은 관심이 있어 이에 대한 연구와 책 출간, 그리고 수련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또한 안광호 의식경영연구회(www.akh.co.kr)’ 라는 비영리 자발적 의식경영 모임을 온/오프로 조직하여 대중들의 의식 향상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비영리 기관에 한해서 재능기부강의인 안광호의 구세강 을 실시하고 있으며, 독서를 통한 대중들의 영적 의식성장을 목적으로 한, 비영리 평생학습조직인 의식경영독서사랑방 모임을 이끌고 있습니다.

 

저서로는[알아차림, 매일경제신문사], [소프트마인드, 비전과리더십], [마음세수, 예문당], [삼성붕괴시나리오, 다산북스], [열다섯 살 꿈의 시크릿, 미래지식], [긍정, 원앤원북스], [나를 행복으로 이끄는 도전, 에이원북스], [6 시그마로 부자아빠 되기, 네모북스], [행복한 사과나무 이야기, 아름다운사회] 가 있으며, [꿈과 성공이 있는 명품인생] 이라는 오디오북을 발간하였습니다. 2007년 헤럴드 경제가 주최하는 한국의 아름다운 사람’ 20인에 선정된 바 있습니다.

컨설팅, 코칭, 집필 및 칼럼에 대한 문의 및 의뢰는 khajoh@naver.com, 홈페이지: www.akh.co.kr, 블로그: blog.naver.com/khajoh 페이스북:www.facebook.com/kwanghoahn1, 트위터:www.twitter.com/kwanghoahn

 

[과학과의 통합을 위한 그의 독창적 행보]

l  6 Sigma Black Belt 획득

l  STRONG(직업흥미프로그램) 전문가 획득

l  한국심리학회 MBTI 전문가 획득

l  초기 원형 에니어그램 수련

l  위빠사나 명상 수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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